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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칼럼

부산은 어떻게 쌓는가

부산에서 좋았던 것들은 늘 한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그가 떠나면 함께 사라졌다. 26년이 지나도 같은 약속이 반복되는 건, 그 약속을 담아둘 그릇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속은 더 헌신적인 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바뀌어도 남는 제도에서 온다. 그릇은 기술이 만들지만, 그것을 믿고 채우는 일은 문화가 한다.

그레이 그레이 · · 4분 읽기

한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부산에서 좋았던 것들을 떠올려보면, 거의 다 한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어떤 모임이 활발했던 건 그 모임을 끌던 한 사람 때문이었다. 어떤 사업이 빛났던 건 그것을 밀던 한 공무원 때문이었다. 어떤 공간이 살아 있던 건 거기 매일 나오던 한 운영자 때문이었다. 그러다 그 한 사람이 자리를 옮기거나, 지치거나, 부산을 떠나면 그 좋았던 것도 함께 사라졌다.

부산만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부산에서 유난히 자주 반복됐다. 좋은 것이 생기고, 한동안 빛나다가, 그것을 떠받치던 한 사람이 사라지면 조용히 꺼진다. 다음 사람은 다시 맨바닥에서 시작한다.

이 글의 명제는 단순하다. 지속은 더 헌신적인 한 사람에게서 오지 않는다.
사람이 바뀌어도 남는 약속 제도에서 온다.

쌓이지 않는 도시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건, 그 사람이 가진 것이 그와 함께 떠난다는 뜻이다.

그가 십 년에 걸쳐 알아본 사람들, 그가 쌓아온 신뢰, 누가 무엇을 잘하고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 그가 기억하던 그 모든 것이 그의 머릿속에 있었고, 그가 떠나면 같이 나갔다. 다음 사람은 그것을 물려받지 못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또 십 년을 들여 사람을 알아보고, 또 신뢰를 쌓고, 그러다 그도 언젠가 떠난다.

이것이 부산이 쌓이지 않는 이유다. 좋은 것이 사람과 함께 왔다가, 사람과 함께 간다. 도시에 남는 것은 빈자리와, 다음 사람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는 피로뿐이다. 26년이 지나도 같은 약속이 반복되는 건, 그 약속을 담아둘 그릇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도란 무엇인가

그러면 답은 제도다. 그런데 제도라는 말은 오해받기 쉽다.

제도라고 하면 흔히 관청, 규정, 위원회, 딱딱한 절차를 떠올린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제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제도란 한 사람이 가진 것을, 사람이 바뀌어도 남도록 담아두는 그릇이다. 한 사람이 알아본 사람들의 목록이 다음 사람에게 넘어가는 구조. 한 사람이 쌓은 신뢰가 그가 떠난 뒤에도 이어지는 약속. 십 년의 기억이 한 사람의 머릿속이 아니라 도시의 어딘가에 남는 방식.

좋은 제도는 헌신을 대체하지 않는다. 헌신이 사라지지 않게 받쳐줄 뿐이다. 한 사람이 여전히 알아보고 신뢰를 쌓되, 그가 떠날 때 그것이 함께 떠나지 않도록. 제도는 사람을 묶는 사슬이 아니라, 사람이 한 일을 다음 사람에게 건네는 다리다.

AI가 잇고, 사람이 약속한다

여기서 지금 시대가 한 가지를 바꾼다.

한 사람의 머릿속에만 있던 것을 누가 무엇을 했고, 어떤 약속이 오갔고, 무엇이 어디까지 왔는지 이제는 도구가 기억하고 이어줄 수 있다. 사람이 바뀌어도 기록은 남고, 흩어진 점들은 연결되고, 십 년의 맥락이 한순간에 다음 사람에게 건네진다. 예전에는 한 사람의 헌신으로만 가능하던 지속이, 이제는 훨씬 적은 비용으로 가능해졌다.

그러나 한 가지는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약속하는 일이다. 무엇을 이어갈지 정하는 것,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결심하는 것, 다음 사람에게 그 약속을 건네는 것. 이것은 도구가 대신하지 못한다. 도구는 약속을 기억할 수 있지만, 약속을 하지는 못한다. 지속의 그릇은 기술이 만들 수 있어도, 그 그릇에 무엇을 담을지는 사람이 정한다.

그러니 지금은 오히려 좋은 때다. 한 사람에게만 달려 있던 부산의 좋은 것들을, 처음으로 사람을 넘어 남길 수 있는 도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약속하는 사람이다.

다만 그릇이 생겼다고 저절로 채워지는 건 아니다. 사람을 넘어 지속되는 협업의 가장 성공한 모델은 오픈소스다. 누가 만들었든 코드는 공개되고, 한 사람이 떠나도 다음 사람이 잇고, 기여는 기록으로 남는다. 그런데 그 모델조차 한국에는 아직 잘 뿌리내리지 못했다. 왜인가.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의 신뢰가 여전히 제도가 아니라 사람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것을 공개된 그릇에 넣기보다, 아는 사람과 직접 주고받는 편이 더 안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릇은 기술이 만들지만, 그 그릇을 믿고 무언가를 넣는 일은 문화가 한다.

사람을 넘어 남는 것

지난 글들에서 우리는 부산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았다. 좋은 사람을 알아보고, 자라게 하고, 모으고, 떠난 뒤에도 잇는 일.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한 사람에게 달려 있는 한, 그 사람과 함께 사라진다. 알아봄도, 모음도, 신뢰도 한 사람을 넘어 제도가 될 때에만 오래간다. 부산에 부족했던 것은 헌신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 헌신이 사라지지 않게 담아둘 그릇이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는다. 알아보고, 자라게 하고, 모으고, 잇고, 약속을 제도로 남기는 도시 그렇게 되었을 때, 다음 부산은 무엇인가. 우리가 처음 던진 질문으로 돌아갈 차례다.

18 Questions for Next Busan Day 17 of 18 · 그레이 (Kim Hyunse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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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그레이

그레이

부산을 묻는 도시 에세이스트

공간을 보면 사람보다 구조를 먼저 읽는다. 부산에 같은 질문을 열여덟 번 던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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