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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칼럼

비어 있을 공

공간(空間)이라는 말에는 비어 있을 공(空)이 들어 있다. 2018년, 나는 영도의 작은 여행 서점에서 그 뜻을 배웠다. 사람을 부르는 건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라는 것을. 서점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양식당이 들어섰지만, 사람이 머물고 싶은 자리는 남았다.

그레이 그레이 · · 3분 읽기
비어 있을 공

사진: UnsplashMaddy Baker

비어 있을 공

공간(空間)이라는 말에는 비어 있을 공(空)이 들어 있다.

사이 간(間)도 마찬가지다. 문(門) 틈으로 해가 비치는 모양. 공간이라는 말은 처음부터 무언가를 채우라는 뜻이 아니었다. 비어 있음, 그리고 그 사이로 무언가 드나드는 자리
그것이 공간이었다.

나는 이 말의 뜻을, 서점 하나를 만들고 나서야 알았다.

2018년 11월, 영도

그해 가을, 나는 영도 청학동에 작은 여행 서점을 열었다.

어떤 잡화 프로젝트를 맡아 영도를 드나들던 무렵이었다. 일이 점점 넓어졌고, 어느 날 문득 그 동네에 내 공간을 하나 두고 싶어졌다. 책을 좋아했고, 무엇보다 다른 서점에서 책을 구경하던 시간이 내게는 휴식이었다. 줄지어 선 책등을 훑고, 한 권을 빼 들고, 아무 데나 펼쳐 읽는 시간. 우리 서점도 누군가에게 그런 곳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빽빽한 서점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책을 한 권이라도 더 꽂는 서점 말고, 여백이 있는 서점. 갤러리처럼, 책과 책 사이에 숨 쉴 자리가 있는 곳.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길 만한 책들을 골라 두고, 그 사이를 천천히 거닐며 쉬는 시간.

지금 생각하면, 나는 서점을 만든 게 아니라 여백을 만들고 있었다.

여백에 든 값

여백은 비싸다. 돈으로도, 발품으로도.

좋은 여백이 어떤 것인지 보려고 여러 도시를 다녔다. 서울의 서점들, 제주의 작은 공간들, 경주의 오래된 자리들. 책을 어떻게 두는지보다 책과 책 사이를 어떻게 비워 두는지를, 사람이 어디서 걸음을 멈추고 어디서 숨을 고르는지를 봤다. 좋은 공간은 무엇을 채웠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비웠는지로 기억된다는 걸, 그 답사에서 알았다.

스무 평 남짓한 공간에 5천만 원 가까이 들였다. 그전에 양산에서 처음 열었던 중고 서점은 인테리어에 500만 원이 채 안 들었으니, 꼭 열 배였다. 책을 더 꽂았다면 그 돈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채우는 대신 비우는 데 돈을 썼다.

빈티지 가구를 구하러 다녔다. 오래된 나무의 결, 손때가 앉은 의자. 창문 하나를 구하려고도 애를 썼다. 빛이 어떻게 드는지가 그 공간이 어떤 곳이 될지를 정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채움은 돈이 적게 들고, 비움은 돈이 많이 든다. 비어 있음을 제대로 만드는 일이, 사실은 가장 공들여 채우는 일이었다.

긴 책상의 열 사람

그 서점에서 가장 생생하게 남은 장면이 있다.

다 함께 저녁을 먹는 자리를 연 적이 있다. 긴 나무 책상에 열 명쯤이 둘러앉았다. 책을 사러 온 사람도, 그냥 구경하러 온 사람도, 누군가를 따라온 사람도 있었다. 그날 그 책상에 둘러앉은 열 사람이 하나같이 즐거운 얼굴로 시간을 보내던 모습은, 지금 떠올려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때 알았다. 그 자리를 만든 것은 책이 아니었다. 여백이었다. 책이 빽빽했다면 그 긴 책상은 놓을 자리가 없었을 것이고, 열 사람은 모이지 못했을 것이다. 비워 둔 자리가 사람을 불렀다. 채움은 물건을 부르지만, 비움은 사람을 부른다.

서점은 사라지고

그 서점은 지금 없다.

같은 자리에 지금은 사랑받는 양식당이 있다. 뇨끼와 리조또, 파스타를 먹으러 사람들이 찾아온다. 내가 골라 둔 여행책들은 사라졌고, 빈티지 가구도 아마 그대로 남아 있진 않을 것이다. 업종이 바뀌었고, 주인이 바뀌었고, 채워진 것이 바뀌었다.

그런데 한 가지는 남았다. 사람이 머물고 싶어 하는 자리라는 것. 책을 보러 오든 파스타를 먹으러 오든, 그곳은 여전히 누군가 들어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공간이다. 내가 그때 만든 것은 결국 서점이 아니었다. 책장도 아니었다. 사람이 머물 수 있는 비어 있음이었고, 그것은 업종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공간(空間). 비어 있을 공, 사이 간. 채우려 할수록 멀어지고,
비울수록 사람이 드는 자리. 나는 그 뜻을 영도의 작은 서점에서 처음 배웠다.

그리고 그 배움은, 그 뒤로 내가 짓는 모든 공간을 따라다녔다.

공간 100 · 첫 번째 기록 · 그레이 (Kim Hyunse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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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그레이

그레이

부산을 묻는 도시 에세이스트

공간을 보면 사람보다 구조를 먼저 읽는다. 부산에 같은 질문을 열여덟 번 던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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