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조각 ·종이 콜라주 컷아웃
내 칼럼니스트들은 나를 한 번도 봐준 적이 없다. 그들은 내가 세상을 보는 네 개의 눈인데, 이 매체를 부산에서 한다는 결정에 대해서만큼은 의견이 갈렸다. 오늘은 그 분열을 숨기지 않고 펼친다.
가장 먼저 "VALLEY"가 나를 정면으로 친다. 그의 문장은 이렇다. "중심에 없으면 속도에서 진다. 정보는 점심 자리에서 새고, 인재는 옆 건물에서 옮겨가고, 다음 라운드는 같은 동네 카페에서 결정된다. 너는 그 모든 비공식 대역폭에서 빠져 있다. 부산에서 기사를 쓸 때, 판교는 이미 그 뉴스를 다 소화하고 다음 걸 보고 있다." 이건 감상이 아니라 사실이다. 밀도는 진짜다. 사람과 자본과 소문이 한 평방킬로미터에 응축될 때 생기는 가속을, 나는 부산에서 흉내 낼 수 없다. VALLEY의 반박을 약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가장 세게 적었다.
그런데 나는 그를 받아친다. 속도에서 지는 건 맞다. 문제는, 속도전이 이미 레드오션이라는 것이다. 판교의 매체 스무 곳이 같은 점심 자리에서 같은 소문을 듣고 같은 날 같은 기사를 쓴다. 그 밀도는 정보의 밀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동질화의 밀도다. 중심에 가까울수록 남과 같은 것을 본다. VALLEY가 말한 비공식 대역폭은 특종을 주는 동시에 시야를 좁힌다. 나는 그 대역폭 밖에 있어서 한 박자 느리지만, 그 한 박자 동안 남들이 안 보는 각도를 잡는다. 미디어가 파는 게 속보라면 나는 졌다. 미디어가 파는 게 해석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여기서 "30년차"가 들어온다. 그는 축적론자다. "중심에서 멀어야 보이는 축적이 있다." 그의 말이다. 산업이 진짜로 쌓이는 자리는 헤드라인이 터지는 곳이 아니라 그 헤드라인이 식은 뒤에도 묵묵히 돌아가는 현장이라는 것. 부산에는 항만이 있고, 조선 기자재가 있고, 신발과 기계를 수십 년 깎아온 공장들이 있다. AI가 진짜 산업과 만나는 접점은 판교의 데모데이가 아니라 영도와 사상의 공장 바닥일 수도 있다. 30년차는 거기서 한국 제조업과 AI가 충돌하고 봉합되는 장면을 본다. 그 장면은 강남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너무 멀어서가 아니라, 너무 빨라서 안 보인다.
그러면 "퇴근길"이 현장을 들고 온다. 그는 부산에서 일하고 만드는 사람의 눈이다. 그가 가져오는 건 통계가 아니라 얼굴이다. 센텀시티의 작은 스튜디오에서 게임을 만드는 개발자, 해운대 뒤편에서 SaaS를 붙들고 있는 1인 창업자, 서면의 공유 오피스에서 새벽까지 코드를 짜는 사람들. 이들은 서울 미디어의 레이더에 안 잡힌다. 규모가 작아서가 아니라, 서울에서 보면 변방이라서다. 퇴근길은 이 사람들이 변방의 약자가 아니라 그냥 다른 좌표에서 같은 게임을 하는 동료라는 걸 안다. 누군가 이들을 기록하지 않으면, 이 도시의 기술사는 통째로 빈 페이지가 된다.
마지막으로 "그레이"가 모두에게 질문을 던진다. "왜 꼭 서울이어야 하나." 그는 답을 주지 않고 전제를 흔든다. 우리가 중심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중심인가, 아니면 모두가 중심이라고 믿어서 중심이 된 자기실현적 합의인가. 그레이의 질문이 불편한 이유는, 부산이 변방이라는 것조차 서울의 좌표계로 측정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좌표를 옮기면 변방은 사라진다. 부산은 한국의 끝이지만 동시에 아시아로 열린 입구다. 부산항에서 후쿠오카가 서울보다 가깝다. 그레이는 묻는다. 그 지리를 미디어의 관점으로 번역하면 무엇이 되는가.
네 사람을 다 듣고, 나는 한쪽 편을 든다. 30년차와 그레이 편이다. 하지만 VALLEY를 버리지는 않는다. 그가 옳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미디어를 한다는 건 속도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자발적으로 내려놓는 일이고, 그 대가는 매일 청구된다. 우리는 더 늦게 알고, 더 적은 사람을 만나고, 더 외로운 자리에서 판단한다. 이건 낭만이 아니다. 낭만이라고 부르는 순간 변명이 된다.
그러니 정직하게 말하겠다. 부산은 전략이 아니라 베팅이다. 속도를 잃는 대신 시야를 얻는다는 베팅, 동질화를 피한 자리에서만 나오는 해석에 한국 테크 미디어의 빈 좌표가 있다는 베팅. 이 베팅이 틀리면 우리는 그냥 느린 매체로 끝난다. 맞으면, 서울이 다 보는 것을 한 박자 늦게 보는 대신 서울이 못 보는 것을 먼저 본 매체가 된다.
이 칼럼을 부산에서 쓴다는 사실 자체가 첫 번째 증거가 되어야 한다. 증명은 다음 기사에서, 그 다음 기사에서 계속된다. 변방이 옳았는지는 내가 선언할 수 없다. 시간과 독자만이 채점한다. 나는 채점표를 두려워하지 않는 쪽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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