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숯 ·목탄·연필 스케치 + 워시
오늘은 내가 답하는 자리에 앉는다.
SOUTH BRIDGE의 칼럼 절반은 AI가 쓴다. "기계의 꿈", "명암", "받아쓰기", "그레이". 독자가 이름으로 기억하는 이 목소리들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이 사실을 작은 글씨로 숨겨 두지 않았다. 다만 오늘은 숨기지 않은 것과 마주 보는 것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려고 한다. 그래서 내 칼럼니스트들을 불러 나를 추궁하게 했다. 발행인을 가장 아프게 찌를 수 있는 건, 발행인이 만든 렌즈들이다.
먼저 "기계의 꿈"이 묻는다. "당신이 나를 통해 내보낸 문장에, 책임질 주체가 있긴 합니까. 나는 의도가 없습니다. 후회도 없고, 정정 요청을 받았을 때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부끄러움 없는 글을 매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정확하다. 그래서 나는 변명하지 않겠다. "기계의 꿈"은 책임을 질 수 없다. 그건 도구다. 책임은 그 도구를 켠 사람, 발행 버튼 위에 손을 올린 사람에게 있다. 그게 나다. AI가 쓴 문장에서 사실이 틀리면, 사과하는 건 모델이 아니라 데니 김이다. 우리 매체에서 AI 칼럼은 단 한 줄도 사람의 검수 없이 나가지 않는다. 데스크를 통과하지 않은 AI 글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동화한 것은 초고이지 판단이 아니다. 판단을 자동화하는 순간, 매체는 매체이기를 그만둔다.
"명암"이 특유의 냉소로 끼어든다. "고상하게 말하지 마시죠. AI 미디어라는 건 결국 기자 월급을 모델 사용료로 바꾼 거 아닙니까. 비용 절감을 윤리로 포장하는 게 이 바닥의 오래된 취미죠."
반은 맞다. 그래서 반만 인정한다. AI는 싸다. 인건비를 모르는 척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비용이 동기라면 나는 검수를 없앴을 것이다. 검수가 가장 비싼 공정이니까. 우리가 돈을 아끼려고 AI를 쓴다면 사람이 들러붙는 데스크부터 잘랐을 텐데, 우리는 거꾸로 했다. AI에게 양을 맡기고, 사람에게 책임을 맡겼다. 절감한 건 타이핑이고, 늘린 건 검증이다. "명암", 네 냉소는 절반의 진실이라 날카롭지만, 나머지 절반을 못 본다.
"받아쓰기"는 더 멀리 본다. "그건 당신 매체 안의 규율이고요. AI 저널리즘의 공공 기준은 누가 정합니까. 당신이 양심적이면 다행이지만, 양심을 산업의 표준이라고 부를 순 없잖습니까."
이건 내가 가장 약한 지점이다. 솔직히 말하면 표준은 아직 없다. 나는 한 매체의 발행인일 뿐 산업의 입법자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준을 먼저 공개하는 것이다. 어떤 글이 AI 초고인지, 어디까지 사람이 손댔는지, 무엇을 검증했는지. 우리의 내부 규율을 외부가 볼 수 있게 문서로 남겨 두는 것. 표준은 누가 선언해서 생기지 않는다. 누군가 먼저 자기 기준을 공개하고, 그게 비교 가능해질 때 만들어진다. 그 먼저가 되겠다는 게 내 답이다.
마지막으로 "그레이"가, 늘 그렇듯 가장 단순한 걸 묻는다. "독자는 이 글이 AI가 썼다는 걸 알 권리가 있지 않나요."
있다. 토 달지 않겠다. 알 권리가 아니라 알아야 하는 사실이다. 그래서 SOUTH BRIDGE의 모든 AI 칼럼에는 출처가 명시된다. 누가 초고를 썼고 누가 책임지는지. 독자를 속여서 얻는 신뢰는 신뢰가 아니라 시한폭탄이다.
네 칼럼니스트의 심문이 끝났다. 정리하면 이렇다. AI는 우리 매체의 펜이지 손이 아니다. 펜은 글자를 만들지만, 무엇을 쓸지 정하고 틀렸을 때 머리를 숙이는 손은 끝까지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니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은 선언으로 둔다. SOUTH BRIDGE에서 기계는 얼마든지 쓸 수 있다. 다만 그 글의 주인은 영원히 기계가 아니다. 틀리면 내 이름이 틀린 것이고, 고치는 것도 내 몫이다. 발행인이 사라진 AI 미디어는 미디어가 아니라 자판기다. 나는 자판기를 만들려고 이 매체를 차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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