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윤슬 ·소프트 그라데이션 에어브러시
새벽 다섯 시, 영도다리 건너 깡깡이마을 골목으로 작업복 차림의 사람들이 흘러든다. 한국말, 베트남말, 우즈베크말이 섞인 인사가 오간다. 조선소 사외 협력업체의 용접, 도장, 취부 공정은 외국인 노동자 없이 돌아간 지 오래다. 한진중공업이 떠난 자리, HJ중공업으로 간판이 바뀐 영도의 도크에서도 마찬가지다. 미담의 소재가 아니다. 도시가 누구의 노동으로 굴러가는지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단면이다.
부산을 관광지 리스트로 보면 이 장면은 절대 안 보인다. 감천문화마을 사진과 광안대교 야경, 해운대 카페만 추려내는 순간 정작 그 풍경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손은 프레임 밖으로 밀린다. 일하는 사람의 동선을 따라가야 도시가 보인다. 그리고 지금 부산에서 그 동선의 상당 부분은 외국 국적자의 것이다.
표준어를 누가 정하는가
언어는 정체성의 최전선이다. 부산은 원래 사투리의 도시다. 그런데 사상공단의 작업 현장, 사하구의 원룸촌, 강서구 녹산공단 일대에서 실제로 통용되는 작업 언어는 부산 사투리만이 아니다. 단순화된 한국어, 손짓, 공정별 외래어, 출신국 언어가 겹쳐 굴러간다. 현장의 기능어는 표준국어대사전이 정하지 않는다. 일이 돌아가게 만드는 말이 곧 표준이 된다.
여기서 질문을 바꿔야 한다. 포용이냐 배제냐가 아니라, 누구의 부산이 기본값으로 설정되느냐다. 행정 서식과 병원 접수창구와 부동산 계약서가 한국어 단일 언어를 전제하는 한, 도시의 표준어는 여전히 정주 한국인의 것이다. 다국어 안내판 몇 개 붙이는 건 표면이다. 구조는 기본값을 누구에게 맞추느냐에서 갈린다. 부산글로벌도시재단 같은 기구가 통역과 상담을 붙이는 일이 그래서 시혜가 아니라 표준의 재설정에 가깝다. 다만 아직은 예외 처리에 머문다. 기본값은 그대로 두고 옆에 보조 창구를 하나 다는 방식이다.
두 번째 세대가 만드는 압력
지금 부산의 외국인 흐름은 1세대 노동자 단계를 넘어서고 있다. 사상, 사하, 강서의 산업단지 배후 주거지에는 가족이 들어오고 아이가 학교에 간다. 이 아이들은 부산 사투리로 말하며 부산에서 자란다. 부모의 출신국과 자신이 자란 도시 사이에서, 이들은 어느 한쪽의 번역자가 아니라 두 좌표를 동시에 가진 새로운 부산 사람이다.
여기서 도시 정체성의 협상은 비가역적으로 바뀐다. 노동력은 계약 기간이 끝나면 돌아간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는 돌아갈 곳이 여기다. 학교가 다문화 학생을 별도 프로그램의 대상으로만 다루는 한, 도시는 이 변화를 여전히 부가 기능으로 처리하는 셈이다. 빌더의 관점에서 이건 명확한 신호다. 부산에서 무언가를 설계하는 사람이라면, 가게든 서비스든 콘텐츠든 행정이든, '부산 사람'의 기본 모델을 단일 언어 정주민으로 깔아두는 순간 이미 한 세대 뒤처진 설계를 하는 셈이다.
강한 반론과 응답
반론은 이렇게 온다. 외국인 노동력은 인구와 노동 공백을 메우는 경제적 변수일 뿐 정체성의 주체로 부풀릴 사안이 아니다. 체류 자격은 임시적이고, 정주 의지와 무관한 통계를 도시 서사로 미화하는 건 과잉 해석이다.
절반은 맞다. 모든 외국인 거주자가 부산에 뿌리내리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정체성의 협상은 개인의 정주 의지가 아니라 도시 시스템에 누적된 의존도에서 발생한다. 조선, 항만, 물류라는 부산의 기간산업이 외국 인력 없이 한 분기도 못 버틴다면, 그 의존은 이미 임시변수가 아니라 구조다. 구조가 된 것을 임시라고 부르는 건 회계상 분식에 가깝다. 누가 머물 의지가 있느냐와 별개로, 도시는 이미 이들의 노동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
도시의 태도
부산은 늘 떠나고 들어오는 도시였다. 피란수도였고 환적항이었고, 누군가의 첫 한국이자 누군가의 마지막 항구였다. 이민자 도시라는 말은 새 정체성이 아니라 원래 정체성의 갱신이다. 다음 말을 누가 쓰느냐가 다음 부산을 정한다.
도시의 표준어는 가장 많이 일하는 입에서 다시 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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