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을 닫고 나왔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오후가 있다. 작업이 막혔다기보다, 그동안 입력이 없었다는 걸 몸이 먼저 안다. 그런 날의 부산은 의외로 친절하다. 바다 쪽으로 한 정거장만 움직여도 풍경이 바뀌고, 그 변화 자체가 환기가 된다. 부산은 채우기 전에 비울 줄 아는 도시다. 비울 줄 아는 도시가 결국 채울 줄도 안다.
무엇을 보러 가느냐가 아니라, 어떤 모드로 갈 거냐
같은 전시라도 들어가는 마음에 따라 가져오는 게 다르다. 머리가 과열됐을 땐 정보가 적은 곳이 좋다. 이우환공간을 품은 부산현대미술관은 낙동강 하구 을숙도 물가에 있어서, 작품을 보기 전에 길에서 만나는 갈대밭과 물새가 먼저 속도를 늦춰준다. 강에서 바다로 넘어가는 경계의 풍경이라, 도착하기도 전에 머릿속이 한 칸 비워진다. 텍스트를 많이 읽지 않아도 되는 큰 설치 작업 앞에 오래 서 있는 것만으로 충전이 된다.
반대로 손이 근질거리는 날, 제작의 감각이 그리운 날이라면 F1963이 맞다. 옛 와이어 공장을 고친 복합문화공간이라, 건물 자체가 낡은 것을 버리지 않고 다시 쓰는 태도를 보여준다. 노출된 골조와 녹슨 철골을 그대로 살린 천장을 올려다보면, 부수지 않고 고쳐 쓴 손길이 어디까지 갔는지 눈으로 따라가게 된다. 만드는 사람에겐 그 구조가 곧 레퍼런스다. 전시를 보러 갔다가 공간의 디테일을 더 오래 들여다보게 되는 곳이다.
영감이 아니라 기분 전환이 필요하면 영화의전당으로 간다. 밤에 보면 거대한 지붕 아래로 빛이 흐르는데, 그 천장을 따라 번지는 조명 아래 가만히 앉아 있으면 상영 시간을 굳이 안 맞춰도 머리가 식는다. 도시가 비일상을 위해 일부러 만든 무대라는 게 몸으로 느껴진다.
동선은 짧게, 여운은 길게
부산에서 충전은 욕심내지 않는 게 요령이다. 하루에 한 곳, 길어야 두 곳. 원도심이 그립다면 또따또가 일대를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비어가던 원도심 건물에 예술가들이 들어와 작업하는 동네라, 완성된 전시보다 만들어지는 과정의 공기가 더 진하게 남는다. 감천문화마을도 결이 같은데, 관광지로만 보면 시끄럽지만 평일 이른 시간에 가면 색과 골목의 리듬이 다르게 읽힌다. 사람이 동네를 어떻게 다시 살려내는지, 그 자체가 기획자에게 좋은 케이스 스터디다.
고를 때 기준은 단순하다. 오늘 내게 부족한 게 색인지, 소리인지, 공간감인지부터 정한다. 부족한 한 가지만 채우러 간다고 생각하면 동선이 저절로 정리된다. 후기나 별점은 잠시 닫아두자. 충전은 남이 좋다고 한 걸 확인하러 가는 게 아니라, 내 감각의 빈칸을 찾으러 가는 일이다.
돌아오는 길에 작업이 풀리지 않아도 괜찮다. 부산은 잘 비운 사람에게만 다음 장면을 슬쩍 보여준다. 비우러 갔다가 채워서 돌아오는 도시, 그게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는 작은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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