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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힌 날, 부산은 비우는 도시

작업이 막힌 오후, 부산은 채우기 전에 비우는 법부터 보여준다. 무엇을 보러 가느냐보다 어떤 모드로 가느냐. 머리가 과열된 날, 손이 근질거리는 날, 기분 전환이 필요한 날에 맞는 동선과 안목.

퇴근길 퇴근길 · · 3분 읽기
막힌 날, 부산은 비우는 도시

화면을 닫고 나왔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오후가 있다. 작업이 막혔다기보다, 그동안 입력이 없었다는 걸 몸이 먼저 안다. 그런 날의 부산은 의외로 친절하다. 바다 쪽으로 한 정거장만 움직여도 풍경이 바뀌고, 그 변화 자체가 환기가 된다. 부산은 채우기 전에 비울 줄 아는 도시다. 비울 줄 아는 도시가 결국 채울 줄도 안다.

무엇을 보러 가느냐가 아니라, 어떤 모드로 갈 거냐

같은 전시라도 들어가는 마음에 따라 가져오는 게 다르다. 머리가 과열됐을 땐 정보가 적은 곳이 좋다. 이우환공간을 품은 부산현대미술관은 낙동강 하구 을숙도 물가에 있어서, 작품을 보기 전에 길에서 만나는 갈대밭과 물새가 먼저 속도를 늦춰준다. 강에서 바다로 넘어가는 경계의 풍경이라, 도착하기도 전에 머릿속이 한 칸 비워진다. 텍스트를 많이 읽지 않아도 되는 큰 설치 작업 앞에 오래 서 있는 것만으로 충전이 된다.

반대로 손이 근질거리는 날, 제작의 감각이 그리운 날이라면 F1963이 맞다. 옛 와이어 공장을 고친 복합문화공간이라, 건물 자체가 낡은 것을 버리지 않고 다시 쓰는 태도를 보여준다. 노출된 골조와 녹슨 철골을 그대로 살린 천장을 올려다보면, 부수지 않고 고쳐 쓴 손길이 어디까지 갔는지 눈으로 따라가게 된다. 만드는 사람에겐 그 구조가 곧 레퍼런스다. 전시를 보러 갔다가 공간의 디테일을 더 오래 들여다보게 되는 곳이다.

영감이 아니라 기분 전환이 필요하면 영화의전당으로 간다. 밤에 보면 거대한 지붕 아래로 빛이 흐르는데, 그 천장을 따라 번지는 조명 아래 가만히 앉아 있으면 상영 시간을 굳이 안 맞춰도 머리가 식는다. 도시가 비일상을 위해 일부러 만든 무대라는 게 몸으로 느껴진다.

동선은 짧게, 여운은 길게

부산에서 충전은 욕심내지 않는 게 요령이다. 하루에 한 곳, 길어야 두 곳. 원도심이 그립다면 또따또가 일대를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비어가던 원도심 건물에 예술가들이 들어와 작업하는 동네라, 완성된 전시보다 만들어지는 과정의 공기가 더 진하게 남는다. 감천문화마을도 결이 같은데, 관광지로만 보면 시끄럽지만 평일 이른 시간에 가면 색과 골목의 리듬이 다르게 읽힌다. 사람이 동네를 어떻게 다시 살려내는지, 그 자체가 기획자에게 좋은 케이스 스터디다.

고를 때 기준은 단순하다. 오늘 내게 부족한 게 색인지, 소리인지, 공간감인지부터 정한다. 부족한 한 가지만 채우러 간다고 생각하면 동선이 저절로 정리된다. 후기나 별점은 잠시 닫아두자. 충전은 남이 좋다고 한 걸 확인하러 가는 게 아니라, 내 감각의 빈칸을 찾으러 가는 일이다.

돌아오는 길에 작업이 풀리지 않아도 괜찮다. 부산은 잘 비운 사람에게만 다음 장면을 슬쩍 보여준다. 비우러 갔다가 채워서 돌아오는 도시, 그게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는 작은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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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퇴근길

퇴근길

기술 전환기 현장 관찰자

발표장 맨 앞줄보다 새벽 항만 게이트가 더 궁금하다. 기술에 먼저 젖는 어깨를 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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