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조각 ·종이 콜라주 컷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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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의 한 공공기관 직원이 인터뷰에서 무심하게 말했다. "금요일이 사라진 게 아니라, 금요일을 누가 가질 자격이 있는지 우리가 처음으로 물어본 거예요." 영국 4 Day Week Foundation의 대규모 실험을 다룬 가디언 칼럼에서도 비슷한 문장이 반복됐다. 시간이 늘었다는 보고보다, 그 시간이 어디로 흘러갔는가라는 질문이 훨씬 길게 다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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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자는 이 장면을 보통 이렇게 읽는다. 좋겠다, 부럽다, 우리도 언젠가. 주 4일제는 곧바로 복지 메뉴판의 한 줄로 번역된다. 연차 늘리기, 워라밸, 삶의 질. 단어들이 하나같이 따뜻하고 하나같이 무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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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해외 담론은 이미 그 따뜻함을 의심하는 단계에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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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다르다. 영미권 노동사회학자들이 던지는 핵심은 "여가가 늘었는가"가 아니라 "누구의 시간이 늘었는가"다. 시간은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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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구조는 이렇다. 주 4일제가 적용되는 직군과 그렇지 않은 직군이 갈린다. 사무직 정규직은 금요일을 얻는다. 플랫폼 배달, 돌봄, 청소, 콜센터, 야간 물류는 바로 그 금요일에 더 많은 호출을 받는다. 누군가의 쉬는 금요일은 누군가의 더 바쁜 금요일로 정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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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쪽 논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간다. 줄어든 시간을 메우는 건 결국 인공지능과 비정규 외주라는 지적이다. 정규직의 4일은 자동화와 하청의 5일, 6일로 메워진다. 시간을 산 사람과 시간을 판 사람이 같은 도시 안에서 정확히 마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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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좌파 칼럼니스트들은 이걸 새로운 계급 지표라 부르기 시작했다. 20세기 계급을 임금과 자산으로 쟀다면, 21세기 계급은 자기 시간을 통제할 권한으로 잰다는 것이다.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 일정을 자기가 짤 수 있는 사람이 위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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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간이 곧 신분이다. 캘린더의 빈칸을 가진 자와 남의 호출로 캘린더가 채워지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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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레임으로 보면 주 4일제는 해방이 아니라 재분배의 전선이다. 시간을 어떻게 나눌지를 둘러싼 분배 투쟁이고, 분배에는 늘 이긴 쪽과 진 쪽이 있다. 해외 미디어 비평이 주목하는 것도 그래서 도입 여부가 아니라 도입의 경계선이다. 누가 안쪽이고 누가 바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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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강한 반론이 가능하다. 한국은 주 4일제 도입조차 못 했는데 계급 운운은 사치 아니냐, 일단 시간부터 늘리고 따지자는 말. 절반은 맞다. 하지만 도입의 설계도를 그리는 지금이 바로 경계선이 그어지는 순간이다. 누가 포함되고 누가 빠지는지는 제도가 자리잡은 뒤엔 바꾸기 어렵다. 질문을 늦게 시작하면, 답은 이미 굳은 뒤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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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이 논쟁을 늦게 수입할 때의 위험이 정확히 그것이다. '여가 확대'라는 따뜻한 이름으로 들여오면, 누가 그 여가에서 배제되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부산의 한 물류센터 야간조와 서면 오피스의 기획팀은 같은 '주 4일제 시대'를 전혀 다른 몸으로 통과한다. 한쪽은 금요일을 얻고, 한쪽은 그 금요일의 주문량을 떠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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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든 제도든, 한국은 보통 제품으로 먼저 만난다. 그러나 주 4일제는 제품이 아니라 질문이다. 시간이라는 자원을 사회가 어떻게 가를 것인가라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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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늦게 수입하는 것은 4일제라는 제도가 아니다. 시간이 새로운 계급이 되었다는 인식, 그 질문 자체다. 질문을 남의 언어로 늦게 받으면, 우리는 우리 시간의 분배를 남이 짜둔 설계도대로 살게 된다. 해석이 늦으면, 시간의 주인 자리도 늦게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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