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번짐 ·수묵 담채 + 미니멀 선
향수는 디자인이 아니다
1990년대 부산을 배경으로 한 인디게임을 켜면 가장 먼저 칭찬하고 싶어지는 건 골목의 밀도다. 색바랜 간판, 좁은 비탈, 연탄재가 쌓인 계단. 플레이어는 감탄하고, 스크린샷을 찍고, "고증이 좋다"고 적는다. 비평이 거기서 멈추면 그 게임은 박물관 기념품점에서 파는 자석과 다를 게 없다.
게임을 그래픽과 분량과 화제성으로만 보는 시선은 부산 배경 인디게임 앞에서 특히 무력해진다. 이런 작품의 핵심 자산은 폴리곤 수나 맵 크기가 아니라 데이터의 출처다. 개발자가 옛 부산을 어디서 가져왔는가. 외할머니 집 기억인가,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같은 곳의 사진 아카이브인가, 아니면 다른 게임에서 본 '90년대 한국'의 클리셰인가. 향수는 감정이지 설계가 아니다. 설계는 그 감정을 만들려고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뺐는가에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장르를 놀이가 아니라 사료로 읽자고 제안한다. 게임은 도시의 한 시점을 좌표와 텍스처로 고정한다. 한번 빌드되면 그 부산은 더 이상 변하지 않는다. 사진보다 강력한 박제다. 사진은 한 프레임이지만, 게임은 걸어 다닐 수 있는 한 프레임이니까.
빈칸이 곧 권력이다
사료로서의 게임을 평가하는 기준은 단 하나, 무엇이 빠졌는가다.
부산의 1990년대는 매끈하지 않았다.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도시의 공장과 가게를 쓸어갔고, 산복도로 판자촌의 삶은 관광엽서가 될 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영도와 사상의 노동, 남포동의 호황과 그 뒤의 그늘. 어떤 게임이 부산을 따뜻한 골목과 정 많은 이웃으로만 채운다면, 그건 복원이 아니라 도색이다. 빠진 칸이 곧 그 개발자가 행사한 편집 권력이다.
니어 오토마타나 디스코 엘리시움이 평가받는 지점도 사실 여기다. 풍경을 예쁘게 그려서가 아니라, 그 세계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기로 했는지를 플레이어가 직접 더듬게 만들어서 강하다. 'What Remains of Edith Finch'는 한 가족의 집을 통째로 사료로 만들었는데, 그 집의 힘은 디테일의 양이 아니라 각 방이 누구의 시점으로 잠겨 있는가라는 구조에서 나온다. 부산을 다루는 인디게임이 배워야 할 건 골목 텍스처가 아니라 이 시점의 정치학이다.
여기서 강한 반론이 가능하다. "인디 개발자 한 명에게 도시사 전체의 균형을 요구하는 건 가혹하다. 그는 학예사가 아니라 자기 유년의 부산을 그린 것뿐이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핵심이다. 사적 기억이라는 걸 작품이 스스로 밝히는 순간, 그것은 '부산'이 아니라 '한 사람의 부산'이 되고 비평은 정직해진다. 문제는 사적 편집을 객관적 고증인 척 파는 경우다. '진짜 90년대 부산'이라는 마케팅 카피가 붙는 순간, 빈칸은 거짓말이 된다.
마찰이 기억을 붙든다
도시 사료로서 게임이 사진이나 다큐멘터리를 이길 수 있는 단 하나의 무기는 상호작용이다. 그런데 부산 배경 인디게임 다수는 이 무기를 스스로 버린다. 풍경 속을 자유롭게 걷고, 아무 마찰 없이 노스탤지어를 흡입하게 만든다. 워킹 시뮬레이터의 가장 게으른 형태다.
기억은 매끄러울 때가 아니라 걸릴 때 새겨진다. 좋은 사료 게임이라면 플레이어에게 거부와 제약을 줘야 한다. 가게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NPC가 사투리로 묻는 말을 못 알아들어 길을 잃고, 1997년이 되면 늘 지나던 골목의 공장이 셔터를 내린다. 이 의도된 불편이 풍경을 사건으로 바꾼다. 재미는 생성된 디테일의 총량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부딪히는 마찰의 설계에서 나온다. 모든 문이 열려 있는 도시는 기억되지 않는다.
한국 인디 씬에 이 각도가 중요한 이유가 있다. 부산은 지금 산복도로와 원도심을 빠르게 재개발하며 자신의 90년대를 실시간으로 지우는 중이다. 사라지는 도시를 누군가는 저장해야 하고, 그 저장의 권한이 학예사나 행정이 아니라 게임 개발자 개인에게 넘어오고 있다. 기회이자 책임이다. 개발자가 "예쁘게 복원했다"는 칭찬에 만족하는 순간, 그는 도색공이 된다. 반대로 자기가 무엇을 빼고 무엇을 박제했는지 작품 안에서 자백하는 순간, 그는 비로소 사관이 된다.
부산 인디 씬이 가야 할 곳은 더 정교한 골목이 아니다. 자기 편집권을 드러내는 정직한 빈칸이다.
이 글이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이 글이 유용했다면 공유해 주세요
1UP 칼럼 더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