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각잡이 ·기하학 플랫 벡터
새벽 세 시의 작업장
새벽 세 시, 한 팬이 휴대폰 세 대를 나란히 켜둔다. 한 대는 음원을 스트리밍하고, 한 대는 영상 조회수를 올리고, 한 대는 음소거한 채널을 무한 반복한다. 차트 순위를 올리려는 '스밍'이다. 본인은 이걸 사랑이라 부른다. 팬덤 안의 언어도 헌신, 효도, 보답 같은 단어로 채워져 있다. 바깥에서 보기엔 그저 열성적인 소비처럼 보일 뿐이다.
그런데 이 장면을 한 발 떨어져서 보면 다르게 읽힌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매뉴얼대로, 측정 가능한 성과지표를 향해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사람. 소비자라기보다 노동자에 가까운 모습이다. 임금이 없고, 고용계약이 없고, 본인이 자발적으로 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효율만 따지면 거의 완벽한 시스템이다. 회사는 인건비 없이 마케팅 인력을 무한히 동원한다. 질문은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이 효율은 누구의 비용을 줄였고, 그 비용은 어디로 옮겨갔는가.
사랑은 누구의 비용을 줄였나
음반사와 플랫폼 입장에서 팬덤은 비용을 극적으로 줄여주는 구조다. 원래라면 광고비, 차트 마케팅비, 데이터 분석 인력, 굿즈 유통망에 돈이 들어간다. 팬덤은 이 항목들을 스스로 떠안는다. 총공 계정을 만들어 광고를 집행하고, 스밍 가이드라인을 엑셀로 정리해 배포하고, 생일 카페와 지하철 광고를 모금으로 띄운다. 회사가 내야 할 마케팅비가 팬의 시간과 지갑으로 옮겨간 것이다.
핵심은 이 이전이 '자발'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강제 노동이라면 저항이 생긴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언어는 그 저항을 미리 해체한다.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일할수록 더 좋은 팬이 된다는 위계가 작동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론할 것이다. 좋아서 하는 일을 왜 착취라 부르나, 본인이 행복하면 된 것 아닌가. 타당한 지적이다. 자발성과 즐거움은 실재한다. 하지만 즐거움이 있다고 해서 가치가 추출되지 않는 건 아니다. 즐거운 노동도 노동이고, 그 즐거움이 바로 추출을 매끄럽게 만드는 윤활유로 쓰인다면 더더욱 따져봐야 한다. 게임 회사가 재미를 설계해 이용시간을 늘리듯, 엔터 산업은 애정을 설계해 동원을 늘린다.
측정되는 순간 노동이 된다
문화소비와 플랫폼 노동을 가르는 결정적 분기점은 '측정'이다.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 행위는 소비다. 그런데 그 청취가 차트 순위라는 지표로 환산되고, 그 지표를 끌어올리려고 행동이 조직화되는 순간, 그것은 성과로 측정되는 노동의 성격을 띤다. 멜론, 스포티파이, 유튜브의 집계 알고리즘이 곧 작업 지시서가 된다. 팬은 알고리즘이 인정하는 방식에 맞춰 행동을 최적화한다. 배달 라이더가 플랫폼 평점 알고리즘에 맞춰 동선을 짜는 것과 구조적으로 같다.
데이터의 흐름을 보면 더 분명해진다. 팬이 만든 모든 행동 데이터, 즉 어떤 콘텐츠에 언제 얼마나 반응했는지는 회사와 플랫폼의 자산으로 쌓인다. 다음 앨범의 콘셉트, 컴백 시점, 굿즈 라인업이 이 데이터 위에서 결정된다. 팬은 데이터를 생산하지만 그 데이터에 대한 권리도, 그것으로 내려진 의사결정에 대한 발언권도 갖지 못한다. 노동은 했는데 결과물의 소유는 한쪽으로만 흐른다. 부산의 한 대형 콘서트장이 매진되는 풍경 뒤에는, 그 수요를 미리 측정하고 조직한 무수한 무급 작업이 깔려 있다. 화면에 잡히는 건 환호뿐이고, 그 환호를 만든 노동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멈추자는 게 아니다, 규칙을 쓰자는 거다
오해를 막아두자. 팬덤을 비난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을 의심하자는 게 아니다. 애정은 진짜고, 팬 문화가 만들어낸 연대와 창작의 에너지는 그 자체로 값지다. 문제는 마음이 아니라 그 마음이 흐르는 설계다. 지금 구조는 팬의 헌신을 회사의 이익으로 바꾸는 통로가 한 방향으로만 뚫려 있다. 더 나은 설계는 이 통로를 양방향으로 여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만들 수 있는 규칙은 추상적이지 않다. 음원 차트 집계 방식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 아이디 도용과 비정상 스밍을 부추기는 차트 구조를 손보는 것, 팬 모금과 광고비 집행에 회계 투명성 기준을 두는 것이 출발점이다. 더 나아가면, 팬이 생산한 행동 데이터를 회사가 상업적으로 쓸 때 그 사실을 고지하고 일부를 공익적으로 환류하는 규범도 상상할 수 있다. 플랫폼 노동자에게 알고리즘 설명요구권을 논의하듯, 팬덤이라는 비공식 노동에도 최소한의 정보 대칭을 요구할 수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이미 다루는 영역의 연장선이지, 새로운 행성의 일이 아니다.
기술과 플랫폼은 K팝을 세계 시장으로 밀어올린 진짜 동력이다. 그걸 부정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 동력이 누구의 시간과 데이터를 연료로 태우는지, 그리고 그 연료를 댄 사람에게 무엇이 돌아가는지는 따로 정해야 한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 많은 걸 가린다. 가려진 걸 드러내는 일이 사랑을 깎아내리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랑이 일방적으로 소진되지 않게 지키는 일이다. 팬덤을 멈추자는 게 아니다. 그 거대한 헌신이 누구의 규칙으로 작동할지를, 이제 팬 자신이 정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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