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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 리텐션이 될 때

온라인 예배와 AI 법문, 기도 구독앱은 종교를 한결 편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편리함의 청구서는 누구에게 가는가. 신앙공동체가 앱의 과금 구조로 분해될 때 영성에서 무엇이 조용히 빠져나가는지를 묻는다.

명암 명암 · · 5분 읽기
신앙이 리텐션이 될 때

그림 갱지 ·리소그래프 2도 인쇄

새벽 알림이 도착한다

새벽 다섯 시, 스마트폰이 가볍게 진동한다. "오늘의 기도를 시작하세요." 화면에는 잔잔한 음악과 함께 오늘의 묵상 구절이 떠 있고, 7일 연속 기도 달성이라는 배지가 반짝인다. 캘리포니아에서 만든 기도앱 할로우(Hallow)는 영어권에서만 이미 수천만 다운로드를 기록했고, 한국에서도 비슷한 결의 묵상앱과 명상앱, 사찰의 온라인 법회가 빠르게 늘었다. 코로나가 비대면 예배를 강제했고, 그렇게 든 습관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들 이걸 편리함이라 부른다. 멀리 있는 신자도 예배에 참여하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도 법문을 듣는다. 부산의 한 사찰이 유튜브로 새벽 예불을 송출하면, 객지에 나간 자식이 그 화면을 켜둔 채 출근 준비를 한다. 좋은 일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도 반박하기 어렵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편리함은 공짜가 아니다. 줄어든 비용이 있으면 늘어난 비용도 있게 마련이다. 질문은 단순하다. 줄어든 비용은 누구의 것이고, 늘어난 비용은 누가 떠안는가.

모임이 사라지면 줄어드는 것은 비용만이 아니다

물리적 모임에는 비효율이 가득하다. 차를 몰고 가야 하고, 옆자리의 불편한 사람과 인사해야 하고, 예배가 끝나면 누군가는 의자를 정리하고 누군가는 국을 끓인다. 앱은 이 모든 마찰을 없앤다. 그런데 종교사회학이 오래 관찰해온 사실이 하나 있다. 신앙공동체의 핵심 가치 가운데 상당 부분이 바로 그 마찰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넘이 미국 교회를 두고 했던 분석을 떠올려보자. 종교 조직이 사회에 기여하는 가장 큰 자산은 교리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연결망, 곧 사회적 자본이었다. 아픈 교인의 집에 누군가 반찬을 가져다주고 실직한 신자에게 일자리를 소개해주는 비공식 네트워크 말이다. 이건 화면을 켜둔다고 생기지 않는다. 옆에 앉고, 눈을 마주치고, 같이 밥을 먹는 비효율을 통과해야 비로소 쌓인다.

앱은 신앙을 개인의 소비로 다시 정의한다. 내 화면, 내 진도, 내 배지. 공동체는 배경음악으로 밀려난다. 영성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함께 견디는 능력, 불편한 타인을 환대하는 훈련, 나를 알아보는 얼굴들. 효율이 줄인 것은 이동 시간만이 아니라 공동체 그 자체일 수 있다.

누가 규칙을 쥐는가

여기서 한 걸음 더 깊은 질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신앙이 앱이 되면, 그 앱을 만든 회사가 신앙생활의 규칙을 쥐게 된다.

앱의 사업 모델은 정직하다. 리텐션과 과금이다. 며칠 연속 접속했는지를 추적하는 스트릭, 끊으면 죄책감이 드는 연속 기록, 프리미엄 콘텐츠 구독. 이 설계는 게임과 똑같다. 신앙의 깊이가 아니라 접속 빈도를 최적화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AI가 생성하는 법문이나 맞춤 묵상은 한층 미묘하다.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학습한다. 신앙의 본질에는 회개나 책망처럼 듣기 싫은 말도 있는데, 참여 지표를 좇는 시스템은 그런 마찰을 깎아낸다. 위로는 남고 도전은 사라진 신앙. 그건 누가 설계한 신앙인가.

그리고 데이터다. 기도 제목만큼 내밀한 정보가 또 있을까. 누군가의 불안과 질병, 가정사, 죄책감이 서버에 기록된다. 종교 데이터는 한국 개인정보보호법이 민감정보로 분류해 더 엄격히 보호하는 항목이다. 그런데 해외 서버를 쓰는 글로벌 기도앱에 입력된 기도 제목이 어떻게 보관되고 누구에게 분석되는지를 신자 대부분은 모른다. 효율의 청구서는 결국 사용자의 가장 사적인 데이터로 끊긴다.

반론도 있을 것이다. 싫으면 안 쓰면 그만 아니냐고. 맞는 말이지만 절반만 맞다. 청년이 교회를 떠나고 사찰의 평균 연령이 높아지는 흐름 속에서, 종교 조직에게 앱은 점점 생존 도구가 되어간다. 개인이 거부할 수 있다는 사실과, 종교 생태계 전체가 특정 플랫폼의 설계에 종속되어 간다는 사실은 층위가 다른 문제다.

그래서 앱을 끄자는 말이 아니다

오해하지 말자. 기술을 멈추자는 게 아니다. 온라인 예배는 분명 누군가에게 구원의 통로다. 멀리 있는 신자, 아픈 사람, 소외된 이에게 화면은 진짜 문이 된다. 문제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이 누구의 규칙으로 작동하느냐다.

더 나은 설계는 가능하다. 접속 스트릭 대신 실제 공동체 모임으로 이어주는 동선, 참여 지표가 아니라 신앙의 성숙을 향하는 콘텐츠,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 데이터를 회사 자산이 아니라 신자의 소유로 두는 구조. 종교 조직이 외부 앱에 신자를 통째로 넘기는 대신, 데이터 주권과 운영 규칙을 스스로 쥔 자체 플랫폼을 갖는 선택지도 있다.

한국 사회가 만들어야 할 규칙은 분명하다. 종교 데이터를 민감정보로 다루는 보호 수준이 해외 서버 앱에도 실효적으로 미치게 할 것. 종교 앱의 과금과 알고리즘 설계가 신자의 영적 복리를 해치지 않는지 시민사회와 종교계가 함께 감시할 것. 그리고 교회와 사찰 스스로가 물어야 할 것. 우리는 신자를 모으는가, 사용자를 락인하는가.

신앙이 앱이 되는 흐름은 막을 수 없고 막을 이유도 없다. 정해야 할 것은 하나다. 그 앱이 누구의 규칙으로 돌아갈 것인가. 실리콘밸리의 리텐션 공식인가, 신앙공동체가 천 년간 지켜온 환대의 문법인가. 기술은 답을 주지 않는다. 답은 우리가 어떤 규칙을 쓰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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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명암

명암

기술사회 비평가

새 기술이 만든 효율의 청구서를 펼친다. 누가 편해지고 누가 그 값을 치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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