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숯 ·목탄·연필 스케치 + 워시
런던의 한 시사회에서 벌어진 일
2023년 가을, 영국 작가조합과 미국 WGA가 거의 동시에 같은 단어를 입에 올렸다. 알고리즘. 파업의 협상 테이블에 오른 건 임금만이 아니었다. 스트리밍 플랫폼이 작품의 성패를 사후에 측정하는 방식, 그리고 그 측정값이 다음 작품의 기획을 거꾸로 지배하는 구조였다. 넷플릭스 내부에서 '완주율'과 '2분 이탈'을 어떻게 다루는지 작가들은 알 수 없다고 했다. 데이터는 회사 것이고, 작가는 그 데이터가 만든 취향의 그림자 안에서 글을 쓴다.
한국에서 이 장면은 대개 '할리우드 노조의 임금 투쟁'으로 번역됐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핵심을 비껴간다. 그들이 싸운 진짜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작품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작품의 모양을 정해버리는 보이지 않는 채점표였다.
한국은 이걸 '잘 만든다'로 오해한다
우리 쪽 반응을 보자. 글로벌 OTT에서 한국 드라마가 연달아 상위권에 오르면, 담론은 거의 자동으로 '한국 제작 역량의 승리'로 흐른다. 맞다. 그런데 그 승리의 형태를 들여다보면 이상한 균일함이 보인다.
복수극의 감정 곡선이 비슷하다. 1화 후킹의 위치가 비슷하다. 회차당 클리프행어 간격이 비슷하다. 생존, 데스게임, 재벌가 비밀, 학교 폭력의 사적 응징. 소재는 다른데 구조가 수렴한다. 시청자는 '요즘 한국 드라마 다 비슷하다'고 느끼면서도, 그 느낌을 창작자의 게으름으로 해석한다. 그게 첫 번째 오해다.
이건 게으름이 아니다. 최적화다. 글로벌 플랫폼은 작품을 표현으로 받지 않는다. 베팅으로 받는다. 기획안은 가설이고, 공개는 실험이며, 완주율은 검증이다. 검증을 통과한 패턴은 다음 베팅의 사전 조건이 된다. 창작자가 자유롭게 변주하는 게 아니라, 플랫폼이 사후에 채점한 결과가 다음 창작의 입구를 좁힌다. 다양성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양성을 시도할 베팅의 기댓값이 낮아진다.
해외는 이미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미국의 문화비평은 이 현상을 'algorithmic mediocrity', 알고리즘이 강요하는 평균값이라 부른다. 음악 쪽에서는 리즈 펠리가 스포티파이를 분석하며 '무드 기반 청취'가 어떻게 곡을 배경음으로 납작하게 만드는지 추적했다. 작가 윌리엄 데레저위츠는 예술가가 플랫폼의 데이터 노동자로 재편되는 과정을 일찍부터 경고했다. 명제는 하나다. 측정이 가능해지면, 측정 가능한 것만 살아남는다.
유럽의 논쟁은 한 발 더 나간다. EU는 콘텐츠 추천 알고리즘을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문화적 노출의 분배 권력'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디지털서비스법이 추천 시스템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배경에는,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묻히는지를 사기업의 비공개 함수가 결정해선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그들에게 이건 콘텐츠 품질 논쟁이 아니라 문화 주권 논쟁이다.
여기서 반론이 가능하다. 데이터 최적화가 다양성을 죽인다는 건 과장 아닌가. 오히려 플랫폼은 틈새 취향까지 정교하게 공급하지 않는가. 절반은 맞다. 추천은 개인 단위에서 다양해 보인다. 그러나 공급 단의 베팅은 수렴한다. 당신에게 추천되는 열 편이 다 달라 보여도, 그 열 편이 통과한 채점표는 하나다. 소비의 다양성과 생산의 다양성은 다른 층위다. 후자가 무너지는 중이다.
늦게 이해하면 무엇을 잃는가
부산국제영화제는 매년 산업의 좌표를 묻는 자리다. 거기서 'K콘텐츠 호황' 다음에 와야 할 질문은 호황의 지속 가능성이 아니라, 호황을 만든 측정 구조가 누구의 것이냐다. 지금 한국은 제작 단가, 글로벌 판권, IP 확장을 논한다. 다 중요하다. 그런데 정작 작품의 모양을 결정하는 채점표의 소유권은 논의 밖에 있다.
질문을 늦게 수입한다는 건 이런 뜻이다. 해외가 '알고리즘이 창작의 사전 검열이 되는가'를 5년째 싸우는 동안, 한국은 그 싸움을 'OTT 수익 배분 협상'으로 축소해 들여온다. 단어가 도착하지 않으면 논쟁도 도착하지 않는다. 논쟁이 없으면, 구조는 자연 질서처럼 받아들여진다.
위험은 추상적이지 않다. 채점표가 외부에 있으면, 한국 창작은 영원히 남의 실험실에서 가설을 검증하는 위치에 머문다. 잘 통과할수록, 통과하는 법만 정교해진다. 그 끝은 자기복제다. 지금 우리가 '다 비슷하다'고 느끼는 그 균일함이, 성공의 부작용이 아니라 성공의 정의가 되는 순간이다.
해석 주권이란 결국 이것이다. 한국이 늦게 수입하는 건 기술이 아니다. 가끔은 질문 자체를 늦게 수입한다. 그리고 질문을 남이 먼저 정의하면, 답을 아무리 잘해도 그 답은 남의 문장 안에서만 정답이다.
이 글이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이 글이 유용했다면 공유해 주세요
월담 칼럼 더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