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각잡이 ·기하학 플랫 벡터
올해 초 유럽의회 한 위원회 회의장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 동시통역 부스의 인간 통역사들이 자기 직업을 지켜달라며 청원을 냈다는 뉴스가 아니다. 정반대였다. 일부 의원들이 AI 자막 시스템을 회의 공식 기록에 넣자고 제안하자, 통역사 노조가 아니라 법률 자문단이 먼저 제동을 걸었다. 이유가 묘했다. "AI가 무엇을 빼먹었는지 우리가 알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빠진 단어가 문제가 아니었다. 빠진 줄도 모르는 상태가 문제였다.
한국은 이 장면을 편의로 읽는다
한국 독자가 이 뉴스를 접하면 대개 같은 결론에 이른다. 기술이 아직 덜 정교하구나. 조금 더 학습시키면 통역사도 필요 없겠구나. 실제로 국내 보도는 실시간 번역을 거의 항상 "편의"의 프레임으로 옮긴다. 해외여행이 편해진다, 회의가 빨라진다, 외국어 못해도 된다. 갤럭시와 아이폰의 통역 기능이 광고에서 경쟁하는 방식도 정확히 이 프레임 안에 있다. 장벽이 사라진다는 약속.
그런데 유럽의 법률가가 멈춰선 지점은 편의의 반대편이 아니라 그 아래였다. 그가 본 것은 검증 불가능성이었다. 인간 통역사는 틀리면 누군가 알아챈다. 항의하고, 정정하고, 책임을 묻는다. 통역은 두 언어 사이의 다리이기 이전에, 그 다리가 부실할 때 따질 사람이 거기 서 있다는 사회적 약속이었다. AI 자막은 다리를 놓아주지만 다리 옆에 아무도 세워두지 않는다.
한국은 지금 이 기능을 "외국어 학습 안 해도 되는 도구"로 수입하는 중이다. 해외는 이미 다른 질문을 던진다. 외국어 능력이 사라질 때 같이 사라지는, 단어 아닌 무언가는 무엇인가.
외국어는 개인 스킬이 아니었다
여기서 보이지 않던 구조가 드러난다. 우리는 오랫동안 외국어를 개인의 스펙으로 취급했다. 토익 점수, 이력서 한 줄, 자기계발의 영역. 그래서 AI가 그 능력을 대신해주면 순수한 이득처럼 느껴진다. 노동이 줄어드는 일이니까.
하지만 외국어 능력이 실제로 수행하던 사회적 기능은 따로 있었다. 하나는 신뢰의 분산이다. 어떤 조직에 외국어를 아는 사람이 여럿 있을 때, 한 명의 번역이 미심쩍으면 다른 사람이 검증한다. 또 하나는 뉘앙스 협상이다. 계약서의 한 단어, 외교 성명의 어조, 사과문의 수동태와 능동태. 이런 것은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그 언어를 몸으로 아는 사람들 사이의 줄다리기로 결정된다. 마지막은 의심의 권리다. 원문을 읽을 수 있는 사람만이 번역을 의심할 수 있다.
AI 번역이 일상이 되면 이 세 가지가 조용히 외주화된다. 그런데 외주를 받는 쪽은 사람이 아니라 출처를 추적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통번역대학원의 한 교수가 사석에서 한 말을 옮기는 게 아니라, 구조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번역의 품질이 떨어지는 게 문제가 아니다. 번역을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사회 전체에서 줄어드는 게 문제다.
해외는 이걸 '인식론적 의존'이라 부른다
미국과 유럽의 미디어 비평은 이 현상을 이미 더 큰 논쟁에 이어두었다. 영어권에서는 'epistemic dependency', 인식론적 의존이라는 오래된 철학 용어가 AI 시대에 다시 소환됐다. 우리가 직접 검증할 수 없고 전적으로 신뢰해야만 하는 지식의 비율이 늘어나는 현상이다. 번역은 그 가장 내밀한 사례다. 내가 모르는 언어로 쓰인 문장을, 내가 검증할 수 없는 기계가 옮겨주고, 나는 그것을 믿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다.
언어학자들은 또 다른 각도에서 경고한다. 외국어 학습이 단지 소통 도구가 아니라 '타자의 사고방식에 들어가보는 훈련'이라는 오래된 주장이다.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세계가 다르게 잘릴 수 있다는 감각을 얻는 일이다. 번역기는 결과물을 주지만 그 감각은 주지 않는다. 결과만 받고 감각을 잃을 때, 우리는 번역된 세계를 단일한 세계로 착각하기 시작한다. 해외 칼럼들이 "monolingual complacency", 단일언어적 안일함을 경고하는 이유다.
여기에 강한 반론이 가능하다. 그건 엘리트의 향수 아니냐는 것이다. 평생 외국어를 못 배운 대다수에게 AI 번역은 처음으로 세계와 연결되는 사다리다. 검증할 권리를 말하기 전에, 애초에 접근할 권리조차 없던 사람들에게 이 기술은 해방이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답은 기술을 거부하는 데 있지 않다. 사다리는 환영하되, 그 사다리가 어디로 휘어 있는지 따질 사람을 사회가 의도적으로 남겨둬야 한다. 모두가 번역기를 쓰는 것과, 아무도 번역기를 의심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늦게 수입되는 것은 질문이다
한국이 이 논쟁을 늦게 이해할 때의 위험은 구체적이다. 부산의 한 무역회사가 동남아 파트너와 AI 통역으로만 계약을 진행한다고 하자. 분쟁이 생겼을 때 "그 단어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따질 사람이 양쪽 모두에 없다면, 책임은 누구에게 가는가. 모델 제공사는 면책 조항 뒤에 있다. 이건 가까운 미래의 법적 공백이고, 해외는 이미 통역의 '검증 가능성'을 제도 언어로 논쟁하는 중이다.
우리는 실시간 번역을 신제품 기능으로 받았다. 해외는 그것을 신뢰 인프라의 재편으로 받았다. 한국이 늦게 수입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다. 기술은 오히려 동시에, 때로는 더 빨리 들어온다. 늦게 들어오는 것은 그 기술을 어떤 이름으로 부를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편의라고 부를지, 외주화라고 부를지, 인식론적 의존이라고 부를지. 무엇이라 부르느냐가 무엇을 지킬지를 결정한다.
번역가가 사라진 나라의 진짜 손실은 외국어를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번역이 틀렸다고 말할 자격을 가진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격을 누가 가질지 정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어떤 번역기도 대신해줄 수 없는 마지막 해석 주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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