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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도 축적이다

EU와 미국, 홍콩, 싱가포르, UAE가 라이선스와 스테이블코인 감독으로 한 문장에 수렴했다. 서로 다른 명분이 같은 결론에 도달한 이 장면은 기술 경쟁이 아니라 제도 축적의 경쟁이다. 한국은 그 문장을 베끼는 나라가 될 것인가, 쓰는 나라가 될 것인가.

30년차 30년차 · · 6분 읽기
규제도 축적이다

그림 윤슬 ·소프트 그라데이션 에어브러시

잘한다고 믿는 곳에서 늦는다

한국은 디지털 금융을 잘한다고 믿는다. 전 국민이 모바일로 송금하고, 간편결제 침투율은 세계 최상위권이다. 그런데 가상자산 시장으로 시선을 옮기면 장면이 달라진다. 거래량 기준으로 한국은 늘 세계 상위에 있었지만, 정작 그 거래를 떠받치는 규칙은 거의 외부에서 들어왔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2026년 현재까지 제도적 형태가 확정되지 않았고, 업권법은 2단계 입법이 예고만 된 채 시간을 끌었다.

같은 기간 바깥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EU는 MiCA를 발효시켜 스테이블코인 발행자에게 자기자본과 준비금 분리, 상시 감독을 요구하는 단일 체계를 가동했다. 미국은 GENIUS Act로 결제용 스테이블코인을 연방 차원에서 규정했다. 홍콩은 스테이블코인 조례와 발행 라이선스를 만들었고, 싱가포르 통화청은 단일통화 스테이블코인 프레임워크를 일찍 내놓았다. UAE는 디르함 연동 토큰과 VARA 라이선스로 같은 줄에 섰다.

흥미로운 건 명분이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유럽은 소비자 보호와 통화주권을, 미국은 달러 패권의 디지털 연장을, 홍콩은 본토 자본의 우회로를, 싱가포르와 UAE는 금융허브 유치를 내걸었다. 출발점은 전부 다른데 도착점이 같다. 발행자를 등록시키고, 준비금을 1대1로 묶고, 상환을 보장하라. 다섯 관할권이 서로 다른 이유로 거의 같은 한 문장에 모였다.

빠른 추격으로는 이 문장을 쓸 수 없다

여기서 한국이 익숙하게 빠지는 오해가 있다. 저 문장이 합의됐으니 그대로 번역해 들여오면 된다는 생각. 추격의 논리다. 남이 푼 정답을 빨리 베끼면 격차가 줄어든다는 믿음.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서 통했던 이 모델이 제도에서도 통할 거라고 가정한다.

통하지 않는다. 규제 표준은 완제품이 아니라 협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MiCA 한 줄 뒤에는 키프로스 사태 이후 유럽이 겪은 금융 붕괴의 기억과, 리브라를 좌초시킨 중앙은행들의 공동 방어전이 깔려 있다. GENIUS Act 한 줄 뒤에는 달러를 디지털 인프라로 재배치하려는 미 재무부의 장기 계산이 있다. 문장은 같아 보여도, 그 문장을 만든 나라는 그것을 운용하고 수정하고 수출할 능력까지 함께 가졌다.

번역만 한 나라는 문장을 가지지만 문장의 근육은 가지지 못한다. 다음 라운드, 가령 토큰화 예금이나 국경 간 결제 표준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때, 베낀 나라는 또 베껴야 한다. 매번 한 박자 늦고, 매번 남의 전제를 떠안는다.

여기서 반론이 나온다. 규제는 보수적일수록 좋으니 검증된 해외 표준을 늦게라도 따라가는 게 합리적 아니냐고. 절반은 맞다. 금융 안정성에서 신중함은 미덕이다. 그러나 늦게 따라가는 것과 규칙을 못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다. 신중하게 베끼는 것도 결국 베끼는 것이고, 베끼는 나라는 자국 시장의 고유한 위험, 가령 원화 표시 자산의 환 리스크나 국내 거래소 구조의 특성을 표준에 반영할 발언권이 없다.

제도는 시행착오로만 쌓인다

프런티어 기술의 제도는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시행착오로 쌓인다. 싱가포르 통화청이 단일통화 스테이블코인 틀을 빨리 내놓을 수 있었던 건, 그 전에 핀테크 규제 샌드박스를 수년간 돌리며 수백 건의 실패와 회수를 데이터로 쌓아둔 덕이다. EU의 MiCA는 2018년부터 수년에 걸친 공개 협의와 초안 폐기와 재작성을 거쳤다. 실패가 문서로 남고, 그 문서가 다음 규칙의 입력값이 되는 시스템. 그게 제도의 축적이다.

한국에는 이 축적 구조가 약하다. 금융 규제 샌드박스가 있지만 임시 특례에 가깝고, 특례가 끝나면 경험이 흩어진다. 한 부처가 시도한 실험의 기록이 다음 부처의 자산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담당자가 바뀌면 맥락이 리셋된다. 단기 성과주의는 성공 사례만 보고하게 만들고, 실패는 감춰진다. 감춰진 실패는 학습되지 않고, 학습되지 않은 실패는 같은 형태로 반복된다.

선진 관할권의 진짜 무기는 규칙 자체가 아니라 규칙을 만드는 기관의 기억이다. 영국 FCA, 싱가포르 MAS, 유럽 ESMA는 수십 년치 감독 판단과 그 결과를 내부에 누적해 왔다. 새 기술이 등장하면 과거 사례를 꺼내 비교하고 조정한다. 이 기억의 두께가 곧 표준 협상력이다.

한국이 축적해야 하는 것

그렇다면 무엇을 쌓아야 하나. 먼저 감독 데이터의 영속화다. 가상자산사업자 등록과 트래블룰 시행으로 쌓이기 시작한 거래, 사고, 제재 데이터를, 정권과 담당자를 넘어 축적되는 기관 자산으로 만드는 일이다. 다음은 실패가 폐기되지 않는 실험 구조다. 샌드박스 졸업 기업의 성패와 그 이유를 공개 데이터로 남기고, 다음 규칙 설계의 근거로 재투입하는 회로. 마지막은 표준 협상에 들어갈 전문 인력의 장기 보직이다. 부산 BIFC에 모인 금융중심지 인프라는 하드웨어에 가깝다. 정작 부족한 건 국제 표준 회의에 십 년 단위로 같은 얼굴이 나가 신뢰를 쌓는 사람의 연속성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논의가 늦은 건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발행자를 어떻게 묶고 준비금을 어디에 두고 상환을 누가 보장할지를, 우리 시장의 조건 위에서 스스로 설계해 본 경험이 얇기 때문이다. 그 설계를 한 번 해보고, 틀리고, 고치는 과정 자체가 다음 라운드의 협상력이 된다.

정답이 아니라 질문

추격의 시대에는 정답을 빨리 찾는 나라가 이겼다. 다섯 관할권이 합의한 한 문장은 이미 정답처럼 보인다. 그래서 베끼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 문장은 누군가의 질문에서 나온 답이지, 우리의 질문에서 나온 답이 아니다.

다음 문장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토큰화 예금, 국경 간 결제, 프로그래머블 머니의 규칙은 지금 누군가의 실험실에서 초안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 초안의 전제를 정하는 나라가 다음 표준을 쥔다. 한국이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남이 낸 문제를 빨리 푸는가, 아니면 문제 자체를 만드는가. 프런티어의 시대에는 질문을 먼저 만든 나라가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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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30년차

30년차

산업 축적론자

빠른 추격은 빚이다. 축적의 시간을 건너뛴 기술은 현장에서 그 빚을 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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