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진된 클라우드, 텅 빈 클린룸
2026년의 한 장면. 어떤 AI 스타트업은 모델 가중치를 하루 만에 두 배로 키운다. 데이터센터 사업자는 GPU 주문을 분기마다 갱신한다. 그런데 그 GPU에 붙는 고대역폭 메모리는 줄을 서야 받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은 사상 최고를 새로 쓰는데, 정작 고객이 더 달라고 해도 줄 물건이 없다. 증설 물량이 실제로 풀리는 건 빨라야 2027년 1분기라는 말이 업계에서 반복된다.
이 장면을 흔히 이렇게 읽는다. 메모리 회사들이 다운턴 때 투자를 줄였다가 수요 예측에 실패했다고. 절반만 맞다. 진짜 문제는 예측의 실패가 아니라 시간의 물성이다. 코드는 밤사이에 배포되지만 팹은 밤사이에 서지 않는다. HBM 수요가 폭발한다고 판단한 순간 결정해도, 그 결정이 웨이퍼가 되어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회사의 의지로 단축되지 않는다. 이건 경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재의 문제다.
27년이라는 숫자에 적힌 것
왜 하필 2027년인가. 그 숫자 안에는 보이지 않는 공정표가 접혀 있다. 신규 팹 한 동을 올리려면 부지 정지와 건축에 길게는 1년 반이 든다. 그 위에 클린룸을 잡고, 핵심 장비를 들여놓는다. 노광 장비 한 대의 주문에서 설치까지의 대기 시간이 1년을 훌쩍 넘는 구간이 있다. 장비가 들어와도 곧장 양산이 아니다. 수율을 잡는 램프업에 다시 여러 분기가 필요하다.
이 사슬에서 가장 단단한 마디는 장비다. 극자외선 노광기는 사실상 한 회사가 만든다. 그 회사의 한 해 생산 대수는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전 세계 팹이 순번을 나눈다. 돈을 더 낸다고 줄이 사라지지 않는다. 자본재 리드타임이란 결국 누군가 수십 년에 걸쳐 쌓아 올린 제조 역량의 병목이고, 그 병목은 구매력으로 살 수 없다. 메모리 호황의 진짜 주인공이 D램 회사가 아니라 그 위쪽 장비와 소재라는 사실이, 27년이라는 숫자 안에 적혀 있다.
추격의 문법과 프런티어의 문법
한국 반도체는 추격의 문법으로 1등이 됐다. 남이 먼저 낸 길을 더 빠르고 더 싸게, 더 높은 수율로 따라잡았다. 그 시대에는 정답이 이미 존재했다. 미세화의 방향도, 공정의 로드맵도 앞서 간 자가 그려 놓았다. 우리는 그 답을 누구보다 빨리 풀었다.
프런티어의 문법은 다르다. HBM은 단순한 D램이 아니라 칩을 위로 쌓고 미세한 구멍으로 연결하고 묶어서 패키징하는, 소자와 소재와 조립이 한 덩어리로 엉킨 영역이다. 여기엔 베껴 올 정답이 없다. 수만 번의 시행착오가 회사의 몸에 새겨져야 비로소 수율이 된다. 빠른 추격이 통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베낄 대상이 없는 곳에서는 속도가 아니라 축적이 자산이다. 경쟁사가 같은 장비를 사 와도 같은 수율이 나오지 않는 이유, 그것이 한국이 가진 진짜 해자다. 동시에 그 해자가 장비와 소재에서는 우리 것이 아니라는 게 불편한 진실이다.
단기 성과주의가 갉아먹는 것
선진 제조국은 보이지 않는 데에 길게 투자했다. 일본의 소재 회사들은 수십 년 동안 한 가지 화학에 매달려 포토레지스트와 특수가스의 세계 점유율을 쥐었다. 네덜란드의 장비 생태계는 한 세대에 걸친 산학 협력과 실패의 누적 위에 서 있다. 이들은 분기 실적표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보고 돈을 묻었다.
한국의 시간 감각은 짧다. R&D 예산은 단년도 성과에 묶이고, 안 되는 과제는 빠르게 접힌다. 실패가 한 사람의 흠으로 기록될 뿐 조직의 경험으로 남지 않는다. 그래서 메모리라는 정상의 셀은 가졌지만, 그 위에 노광 장비와 핵심 소재라는 상류는 여전히 남의 손에 있다. 호황의 이익 상당 부분이 그 상류로 흘러 나간다. 여기서 강한 반론이 나올 만하다. 한국은 이미 소부장 국산화에 막대한 예산을 쏟았고 일부 품목은 실제로 대체에 성공하지 않았느냐고. 맞다. 그러나 성공한 품목 대부분은 표준화된 범용재였다. 정작 프런티어의 길목인 극자외선 노광이나 최고난도 소재처럼 수십 년의 축적이 응결된 영역은 거의 손대지 못했다. 따라잡기 쉬운 곳을 따라잡은 것과, 따라잡기 어려운 곳을 따라잡은 것은 다른 일이다.
부산, 그리고 무엇을 쌓을 것인가
축적은 추상이 아니라 장소의 문제다. 부산과 경남에는 정밀가공과 기계, 소재의 중견 제조 기반이 깔려 있다. 반도체 장비의 정밀 부품, 진공과 유체를 다루는 모듈, 검사 장비의 광학 같은 영역은 화려하지 않지만 바로 그 단기 성과주의가 비워 둔 자리다. 수도권 팹의 하청이 아니라 장비 상류의 한 마디를 점유하는 구조로 갈 때, 동남권 제조 벨트는 비로소 축적의 단위가 된다.
무엇을 쌓아야 하는가는 분명하다. 첫째, 실패가 개인의 흠이 아니라 조직의 데이터로 남는 R&D 회계와 평가다. 둘째, 한 가지 소재와 한 가지 모듈을 십 년 단위로 파고드는 전문 중견기업의 생존 토양이다. 셋째, 장비와 소재 인력이 한 회사에서 늙어 갈 수 있는 고용의 연속성이다. 모두 분기 실적표에는 잡히지 않는 항목들이다.
추격의 시대에는 정답을 빨리 찾는 나라가 이겼다. 프런티어의 시대에는 질문을 먼저 만든 나라가 이긴다. 27년에야 증설이 풀린다는 그 시차는, 우리가 셀은 가졌으되 그 위의 질문을 쥔 적 없다는 고백이다. 다음 사이클이 다시 닥치기 전에 물어야 한다. 한국은 이 기술을 십 년 동안 축적할 구조를 가졌는가. 아직은, 가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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