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조각 ·종이 콜라주 컷아웃
잘 만든 칩이 묶이지 못한다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세계 최고의 D램을 찍어낸다는 사실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HBM이라는 제품을 뜯어보면 풍경이 달라진다. HBM은 D램 칩 여러 장을 수직으로 쌓고 그 사이를 수천 개의 미세 구멍(TSV)으로 관통시켜 연결한 구조물이다. 칩을 만드는 일과 그 칩들을 정확히 포개 하나의 부품으로 묶는 일은 서로 다른 기술이다. 앞쪽은 한국이 잘한다. 뒤쪽이 문제다.
엔비디아 AI 가속기 한 장의 원가에서 가장 비싼 단일 부품은 HBM이고, 그 HBM과 GPU를 하나의 패키지로 결합하는 공정은 대만 TSMC의 CoWoS가 사실상 독점한다. 한국 메모리가 아무리 좋아도 그것이 최종 제품으로 묶이는 길목을 다른 나라가 쥐고 있다. 가치사슬의 병목은 칩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칩을 붙이는 곳으로 옮겨갔다. 미세공정이 원자 수준에 닿아 더 작아지기 어려워진 순간, 산업은 작게 만드는 경쟁에서 잘 쌓는 경쟁으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첨단 패키징, 칩렛, 이종집적이라 불리는 영역이다.
추격 모델이 닿지 못하는 자리
한국 반도체는 추격으로 컸다. 일본이 먼저 낸 답을 더 빨리, 더 싸게, 더 많이 푸는 방식이었다. 정답이 정해진 게임에서 한국은 누구보다 빨랐다. 미세공정 로드맵은 친절했다. 다음 노드가 무엇인지, 어떤 장비가 필요한지, 목표 수율이 얼마인지가 업계에 공유돼 있었다. 문제지가 배포된 시험이었고, 한국은 채점에서 1등을 했다.
패키징은 그런 시험이 아니다. 어떤 칩을 어떤 순서로 쌓을지, 열을 어디로 빼고 신호를 어떻게 끌지, 서로 다른 공정에서 나온 칩을 무슨 기준으로 한 몸으로 만들지에 정답표가 없다. 설계와 소재와 공정이 한데 얽혀 있어 한 변수를 건드리면 나머지가 따라 흔들린다. 이건 빨리 푸는 능력이 아니라 오래 틀려본 능력을 요구한다. 수천 번의 불량을 데이터로 남기고 그 데이터를 다음 설계에 되먹이는 순환. TSMC가 CoWoS를 십수 년에 걸쳐 다듬는 동안 쌓은 것은 장비가 아니라 실패의 지층이다. 장비는 돈으로 사도 실패가 쌓인 시간은 살 수 없다.
여기서 흔한 반론이 나온다. 한국은 자본과 인력이 충분하니 돈을 쏟아부으면 몇 년 안에 따라잡는다는 것이다. 절반만 맞다. 클린룸과 본더는 분명 살 수 있다. 그러나 패키징 수율을 끌어올리는 현장 지식, 즉 어느 온도에서 휘어짐이 생기고 어느 구간에서 접합이 어긋나는지에 대한 감각은 매뉴얼에 적히지 않는다. 그것은 라인 옆에 붙어 수년을 깨먹은 엔지니어의 몸에 남는다. 돈은 시간을 단축하지만, 시행착오의 시간 자체를 건너뛰게 해주지는 않는다.
선진국은 길게, 우리는 짧게 센다
대만은 패키징을 변두리 공정으로 두지 않고 가치사슬의 중심으로 끌어올려 수십 년을 투자했다. 미국은 칩스법의 상당 부분을 첨단 패키징 연구와 후공정 국내화에 배정했다. 자국 땅에 패키징 생태계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설계도 결국 남의 손을 빌려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둘 다 당장의 분기 실적이 아니라 다음 십 년의 길목을 보고 돈을 길게 묻었다.
한국의 셈법은 짧다. 후공정은 오래도록 부가가치 낮은 하청 영역으로 취급됐고, 인력과 투자는 화려한 전공정으로 빨려 들어갔다. 성과는 분기로 평가되고 임원의 시야는 임기로 잘린다. 십 년 뒤에야 열매가 맺힐 축적은 누구의 성과표에도 올리기 어렵다. 그렇게 한국은 가장 잘 만든 칩을 남의 패키징 라인에 실어 보내는 구조에 갇혔다. 잘 푸는 능력만 길러온 나라가 문제지가 사라진 시험장 앞에 선 형국이다.
부산 앞바다에 비어 있는 자리
축적은 추상이 아니라 지리로 드러난다. 첨단 패키징은 메모리 팹과 후공정 라인, 소재 업체, 검사 장비, 숙련 인력이 한 권역에 모여 부딪쳐야 데이터가 빠르게 순환한다. 미국이 자국 내 후공정 클러스터를 다시 세우려는 이유가 그것이다.
부산과 동남권을 보면 빈자리가 선명하다. 이 지역에는 기계와 부품, 재료를 다루는 제조 기반과 항만 물류가 있고, 부산항이라는 글로벌 출구가 있다. 그러나 첨단 패키징을 받아낼 후공정 클러스터는 사실상 비어 있다. 수도권과 중부권 팹에서 멀리 떨어져 데이터가 순환할 권역을 이루지 못한다. 동남권의 제조 역량을 후공정 생태계로 번역하는 일, 소재 검증과 본딩 공정과 검사 장비를 한 권역에 모아 실패가 곧장 다음 설계로 되먹임되는 밀집을 만드는 일이 비어 있는 숙제다.
무엇을 쌓아야 하는가는 분명하다. 먼저 패키징 소재와 본딩, 검사 장비의 국산화다. 공정의 핵심 자재를 수입에 기대면 데이터의 순환이 국경에서 끊긴다. 다음은 수율 데이터를 자산으로 남기는 시스템이다. 불량을 비용으로만 처리하지 않고 다음 설계로 되먹이는 회로를 만들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패키징을 전공정의 부속이 아니라 독립된 학문이자 경력 경로로 세우는 일이다. 십 년을 한 공정에 머문 엔지니어가 천대받지 않아야 지식이 사람의 몸에 남는다.
추격의 시대에는 정답을 빨리 찾는 나라가 이겼다. 한국은 그 시험의 우등생이었다. 그러나 패키징의 시대에는 채점할 정답표가 없다. 어떤 칩을 어떻게 쌓을지 묻는 질문 자체가 산업의 지도를 다시 그린다. 우리는 남이 낸 문제를 빨리 푸는가, 아니면 문제를 먼저 만드는가. 프런티어의 시대는 질문을 먼저 만든 나라가 이긴다.
이 글이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이 글이 유용했다면 공유해 주세요
30년차 칼럼 더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