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윤슬 ·소프트 그라데이션 에어브러시
영수증 한 장이 바꾸는 것
거래소가 사용자에게 거래 영수증을 의무적으로 발행한다. 언뜻 사소한 행정 변화로 보인다. 하지만 영수증을 발행한다는 건 거래소가 매 체결마다 자산의 소유권 이전을 법적으로 증명하는 주체가 된다는 뜻이다. 코인을 사고파는 장터에서, 권리의 이전을 기록하고 보증하는 기관으로 성격이 바뀐다.
여기서부터 질문이 달라진다. 업비트와 빗썸은 한국 안에서 압도적으로 강하다. 거래량도, 사용자 수도, 브랜드 신뢰도도 국내 1, 2위를 다툰다. 그런데 이 강함은 거의 전적으로 국내 리테일 투자자의 매매 회전에서 나온다. 토큰화 증권, 그러니까 부동산이나 채권, 비상장 지분을 블록체인 위에 올려 거래하는 시장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이 강함의 근거가 흔들린다. 영수증 의무화는 그 전환의 입구이지 보증서가 아니다.
창업자의 문제가 아니다
흔한 진단은 이렇다. 거래소가 매매 수수료에 안주했고 혁신을 게을리했다는 것. 절반만 맞다. 두나무와 빗썸코리아 경영진이 토큰화 증권의 잠재력을 모를 리 없다. 미국의 코인베이스가 토큰화 주식을 밀고 싱가포르와 홍콩이 제도 정비에 들어간 흐름을 그들이 안 읽었을 리도 없다. 야심은 이미 글로벌을 향해 있다.
병목은 다른 데 있다. 토큰화 증권은 거래소 혼자 만들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기초자산을 신탁할 기관, 권리를 법적으로 확정할 등기, 예탁 체계, 발행을 인수할 증권사, 그리고 그 토큰을 사줄 기관 투자자가 동시에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이 다섯 축 중 거래소가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건 거래 플랫폼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한국예탁결제원과 금융위원회, 기존 증권업계의 손에 있다.
이걸 창업자 역량 문제로 부르면 진단을 잘못한 것이다. 두나무가 더 똑똑해진다고 예탁결제원의 토큰 증권 인프라가 빨라지지 않는다. 생태계의 박자가 안 맞는 것이지 주자의 다리가 느린 게 아니다.
싱가포르와 한국, 같은 기술 다른 결과
비교하면 선명해진다. 싱가포르의 DBS은행은 자체 디지털 거래소에서 토큰화 채권을 발행해 기관에 판다. 은행과 거래소와 발행 기능이 한 지붕 아래 묶여 있다. 규제 당국 MAS는 샌드박스로 실험을 허용하고, 성공한 모델을 제도로 흡수한다. 기술이 특별히 앞서서가 아니다. 자본과 인가와 고객이 한 곳에 모이도록 구조가 설계돼 있다.
한국은 정반대다. 은행은 가상자산을 못 만지고, 거래소는 증권업 인가가 없으며, 증권사는 블록체인 발행 경험이 얕다. 각자의 칸막이가 높다. 디지털자산기본법은 이 칸막이에 문 하나를 내려는 시도다. 다만 문 하나로 다섯 칸을 잇기엔 멀다. 토큰화 증권의 핵심 고객인 연기금과 자산운용사가 토큰을 자산으로 인정해 매입할 회계, 규제 근거가 아직 모호하다. 고객 접근이 막힌 시장은 아무리 좋은 인프라를 깔아도 거래가 돌지 않는다.
네 개의 병목
자본. 토큰화 증권은 매매 수수료가 아니라 발행, 수탁 수수료로 먹고산다. 이 수익 모델은 기관 자금이 들어와야 성립한다. 국내 거래소의 자본은 리테일 변동성에 묶여 있어 긴 호흡의 인프라 투자에는 불리하다.
인재. 블록체인 엔지니어는 있다. 부족한 건 증권 발행 구조와 신탁 법리를 아는 사람, 그리고 그걸 코드로 옮길 줄 아는 사람의 교집합이다. 핀테크와 전통 금융의 경력이 한 사람 안에 섞이는 일이 한국에선 드물다.
규제. 디지털자산기본법은 출발선이다. 진짜 관문은 자본시장법과의 정합성이다. 토큰이 증권이면 증권업 인가가, 증권이 아니면 다른 규율이 필요하다. 이 경계가 사안별로만 정해지면 사업자는 매번 유권해석을 기다려야 한다.
고객. 가장 깊은 병목이다. 토큰화 증권을 사줄 기관이 한국에 충분히 형성돼 있지 않다. 미국은 블랙록 같은 운용사가 토큰 펀드를 직접 굴리며 수요를 만든다. 수요가 없으면 공급은 전시품에 그친다.
부산을 보면 이 문제가 추상이 아니다. 부산은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됐지만, 토큰화 부동산이나 물류 자산을 실거래로 돌릴 기관 수요와 법적 확정 절차가 받쳐주지 못해 실증이 시연 수준에 머문 사례가 많았다. 특구라는 인프라는 깔렸는데 그 위를 달릴 자본과 고객이 따라오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바뀌어야 하나
한 가지 반론이 가능하다. 시장이 작아서 그렇지 키우면 자연히 풀린다는 것이다. 일리는 있다. 다만 순서가 거꾸로다. 토큰화 증권은 시장이 커진 뒤 인프라가 따라오는 게 아니라, 인프라가 먼저 깔려야 시장이 생기는 종류의 사업이다. 닭이 먼저다.
그렇다면 조건은 명확하다. 거래소를 증권 인프라로 인정하는 인가 경로를 명문화할 것. 예탁과 신탁, 발행을 잇는 표준 규약을 당국이 주도해 깔 것. 연기금과 운용사가 토큰 자산을 합법적으로 담을 회계, 건전성 기준을 먼저 정할 것. 거래소 한 곳의 분발이 아니라 다섯 축의 동시 정렬이 관건이다.
업비트와 빗썸은 이미 세계의 거래소들이 어디로 가는지 보고 있다. 영수증 의무화를 행정 부담이 아니라 권리 인프라로의 전환점으로 읽을 만큼은 멀리 본다. 창업자는 이미 세계를 보고 있다. 이제 생태계가 그 속도를 따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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