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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tups 칼럼

대기업 품 안의 시드머니

삼성 C랩 아웃사이드 9기가 AI와 로봇 스타트업을 다시 불러 모은다. 시드와 인프라를 대기업에서 받는 순간, 창업자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미리 내주는가. 액셀러레이터의 두 얼굴은 결국 한국 창업 생태계의 자생력 문제로 돌아온다.

엑싯요정 엑싯요정 · · 7분 읽기
대기업 품 안의 시드머니

서울 우면동 삼성전자 서울R&D캠퍼스 한쪽에는 외부 스타트업이 입주하는 공간이 있다. C랩 아웃사이드라는 이름이 붙은 그 층에서, 창업 2년차 로봇 팀의 대표는 자기 회사 데모를 대기업 임원들 앞에서 돌린다. 데모가 끝나면 그는 라운지로 내려가 무료 회의실을 잡고, 삼성이 연결해준 부품 협력사 담당자와 미팅을 한다. 그날 저녁 그가 SNS에 올린 문장은 이랬다. 이런 인프라를 우리 돈으로 사려면 1년 매출을 다 써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문장에 한국 창업 생태계의 핵심 질문이 들어 있다. 1년 매출을 써야 살 수 있는 것을 공짜로 받을 때, 정말 공짜인가.

받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의심해야 한다

대기업 액셀러레이터가 주는 것은 손에 잡힌다. 삼성 C랩 아웃사이드는 선발 팀에 최대 1억 원 안팎의 자금과 1년간의 입주공간, 멘토링, 그룹사 연계 기회를 제공한다고 알려져 있다. 현대차의 제로원, LG의 사내외 액셀러레이팅, 포스코의 아이디어마켓플레이스도 구조는 비슷하다. 시드 자금에 더해 대기업만 가진 것들, 그러니까 테스트베드, 양산 협력사 네트워크, 규제 대응 경험, 그리고 무엇보다 레퍼런스를 얹어준다.

초기 스타트업에게 이 레퍼런스의 무게는 자금보다 크다. AI 솔루션을 파는 팀이 삼성 그룹사와 PoC를 한 번 돌렸다는 사실은, 다음 고객 앞에서 100장짜리 제안서를 대신한다. 로봇 팀이 현대차 라인에서 검증을 받았다는 한 줄은 후속 투자 라운드의 밸류에이션을 바꾼다. 한국처럼 초기 기업의 신용을 측정할 독립된 장치가 약한 시장에서, 대기업의 인증은 사실상 신용평가를 대신하는 인프라다.

여기서 멈추면 미담이다. 문제는 그다음에 있다.

종속은 계약서가 아니라 로드맵에서 시작된다

대기업 액셀러레이터를 종속이라 부를 때 사람들은 보통 지분이나 독점 계약 같은 문서를 떠올린다. 실제로 한국 프로그램들은 과거의 비판을 의식해 지분을 안 받거나 소수만 가져가는 쪽으로 많이 바뀌었다. 그러니 문서만 보면 종속은 옅어 보인다.

진짜 종속은 제품 로드맵에서 일어난다. 시드와 인프라를 한 대기업에 의존하는 팀은, 자기도 모르게 그 대기업의 사내 수요에 제품을 맞추기 시작한다. AI 팀은 범용 시장이 아니라 그 그룹사 한 곳의 워크플로우에 최적화된 기능을 먼저 만든다. 로봇 팀은 세계 표준 규격이 아니라 그 회사 공장의 레이아웃에 맞춘다. 1년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제품은 정교해졌지만 고객이 한 곳뿐인 회사가 되어 있다. 시드를 준 손이 곧 유일한 시장이 되는 구조다.

이것을 창업자의 판단 실수라 부르는 시선이 있다. 욕심이 앞섰다거나, 큰 고객에 휘둘렸다거나. 나는 그 진단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초기 스타트업이 대기업 인프라 없이 양산과 규제와 첫 레퍼런스를 혼자 뚫는 비용은, 개인의 의지로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창업자가 대기업 품으로 들어가는 것은 나약해서가 아니라, 그 길 말고 빠른 길이 생태계에 깔려 있지 않아서다. 병목은 사람이 아니라 도로에 있다.

글로벌 생태계는 의존을 분산시킨다

이스라엘이나 미국의 초기 생태계와 비교하면 차이가 선명하다. 그곳에도 대기업 액셀러레이터는 많다. 차이는 대기업 프로그램이 생태계의 유일한 관문이 아니라 여러 관문 중 하나라는 점이다.

미국의 초기 창업자는 독립 VC, 엔젤 네트워크, 정부 연구개발 자금, 대학 기술이전, 그리고 기업형 액셀러레이터 사이를 옮겨 다닌다. 한 곳이 첫 고객이 되어도 다른 채널이 다음 고객을 열어주기 때문에, 하나의 대기업에 제품을 완전히 종속시킬 이유가 줄어든다. 이스라엘은 군과 연계된 기술 인력 풀과 초기부터 해외를 겨냥하는 문화 덕에, 자국 대기업이 아니라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첫 고객으로 잡는다. 즉 그들의 생태계는 의존을 여러 곳으로 흩어놓는 설계를 갖고 있다.

한국은 반대다. 초기 자본도, 첫 레퍼런스도, 양산 인프라도, 규제를 함께 풀어줄 파트너도, 상당 부분이 소수의 대기업에 몰려 있다. 그러니 창업자가 합리적으로 선택할수록 한 대기업에 더 깊이 들어가게 된다. 종속은 개인의 약점이 아니라 생태계 자원 분포의 결과다.

병목은 네 곳에 동시에 있다

자본을 보면, 한국의 초기 단계 독립 자본은 후속 라운드로 갈수록 얇아진다. 시드는 정부 지원과 대기업 프로그램으로 어느 정도 받쳐주지만, 글로벌로 키울 시리즈B 이후의 인내자본이 부족하다. 그래서 창업자는 일찍부터 전략적 투자자인 대기업에 손을 내민다.

인재를 보면, 글로벌 시장을 설계해본 경험을 가진 사람이 스타트업보다 대기업에 묶여 있다. 해외 양산과 현지 규제, 글로벌 영업을 해본 인력 풀이 초기 기업으로 흐르지 않는다.

규제를 보면, 신산업일수록 규제가 늦게 정비되고, 그 규제를 먼저 풀어본 경험은 대기업이 갖고 있다. AI 데이터, 로봇 안전 인증, 자율주행 실증 같은 영역에서 규제 대응은 그 자체가 진입 장벽이고, 스타트업은 대기업의 경험에 올라타고 싶어진다.

고객 접근을 보면, 한국의 첫 B2B 고객 다수가 대기업과 그 협력망이다. 첫 매출을 그 안에서 만들면 가장 빠르지만, 동시에 가장 좁다. 부산의 제조 스타트업들이 지역 대기업과 조선 협력사망에 첫 매출을 의존하다 전국으로도 못 나가고 멈추는 사례를, 동남권 창업 현장에서 어렵지 않게 본다. 네 병목은 따로 있지 않고 한 점, 대기업으로 수렴한다.

생태계가 창업자의 속도를 따라가야 한다

그렇다고 대기업 액셀러레이터를 끊으라는 말은 아니다. 시드와 인프라를 받되 종속되지 않으려면, 받는 쪽이 아니라 생태계 쪽이 바뀌어야 한다.

첫째, 대기업 프로그램과 독립 VC, 정부 자금이 한 팀을 두고 경쟁하도록 자본의 입구를 늘려야 한다. 창업자가 시드를 받을 곳이 여럿이면, 한 곳에 제품을 맞출 이유가 줄어든다. 둘째, 대기업 PoC가 그 회사 전용으로 끝나지 않고 산업 표준 레퍼런스로 인정되도록, 검증 결과를 다른 고객도 신뢰하는 공통 인증으로 만들어야 한다. 셋째, 첫 고객을 처음부터 해외에서 잡도록, 글로벌 바이어와 초기 팀을 잇는 네트워크에 자원을 실어야 한다. 국내 대기업이 유일한 첫 고객이 아니게 되는 순간, 액셀러레이터의 두 얼굴 중 어두운 쪽이 사라진다.

반론은 분명하다. 그런 분산형 생태계는 돈과 시간이 많이 들고, 그동안 창업자는 어디서 첫 레퍼런스를 받느냐는 것이다. 맞다. 그래서 대기업 액셀러레이터를 없애자는 게 아니라, 그것을 유일한 길에서 여러 길 중 하나로 강등시키자는 것이다. C랩 아웃사이드 9기에 들어가는 AI와 로봇 팀들은 이미 세계 시장을 보고 제품을 그린다. 창업자의 시선은 벌써 국경 밖에 가 있다. 이제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창업자가 아니라, 첫 고객을 국내 대기업 한 곳으로 좁혀버리는 생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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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싯요정

엑싯요정

스타트업 생태계 전략가

국내 1등엔 강한데 세계로 가는 다리 앞에서 멈추는 한국 팀들. 그 병목을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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