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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tups Culture 칼럼

글로벌이 미국이라는 착각

한국 스타트업이 첫 해외 시장으로 일본과 동남아를 택하기 시작했다. 후퇴가 아니라 진출 순서의 구조가 바뀐 것이다. 문제는 창업자가 아니라, 여전히 옛 지도를 들고 있는 생태계 쪽에 있다.

엑싯요정 엑싯요정 · · 6분 읽기
글로벌이 미국이라는 착각

그림 번짐 ·수묵 담채 + 미니멀 선

부산 센텀시티의 한 SaaS 팀은 작년에 미국 진출 계획서를 버렸다. 대신 후쿠오카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김해공항에서 한 시간 반이면 닿는다. 서울에서 도쿄 가는 것보다 가깝다. 창업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미국 고객 한 명 만나려고 14시간을 날아가 시차에 시달리느니, 같은 비용으로 일본 고객 다섯 명을 만나는 게 낫다고.

이 장면을 단순한 비용 계산으로 읽으면 핵심을 놓친다. 한국 스타트업의 글로벌 진출 공식에서 오래 작동하던 전제 하나가 깨지고 있다. 글로벌은 곧 미국이라는 디폴트 말이다.

미국 디폴트는 어디서 왔나

벤처캐피털 투자 심사 자리에서 글로벌 확장 계획을 물으면 답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실리콘밸리에 법인을 세우고, 와이콤비네이터에 지원하고, 영어권 시장에서 검증받는다. 이 경로가 정답처럼 굳어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시장이고, 가장 큰 자본이 있고, 성공 사례의 언어가 죄다 영어로 쓰여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 디폴트는 창업자가 만든 게 아니다. 생태계가 만들었다. 투자자가 미국 진출을 좋아하니 덱에 미국이 들어가고,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이 실리콘밸리 데모데이로 끝나니 거기를 향하고, 언론이 미국 진출을 성공으로 보도하니 그쪽으로 줄을 선다. 창업자 개인의 야심 문제가 아니라, 생태계가 한 방향으로만 보상 신호를 보낸 결과다.

여기서 흔한 진단이 나온다. 한국 팀은 글로벌 마인드가 약하다, 영어가 부족하다, 현지화 역량이 떨어진다. 창업자를 탓하는 익숙한 문법이다. 그런데 현장은 정반대다. 창업자들은 이미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 멀고 비싼 미국 시장을 1차 목표로 두는 대신, 도달 가능한 근접 시장을 먼저 점령하는 순서로 옮겨가는 중이다.

근접 시장 우선이라는 다른 순서

지금 벌어지는 변화의 정확한 이름은 국내 후 글로벌의 붕괴다. 한국 내수에서 충분히 키운 다음 해외로 나간다는 단계론, 이게 더는 작동하지 않는다. 내수 시장은 5천만 인구에 성장이 멈췄고, 여기서 1등을 해도 글로벌 플랫폼의 부피에는 닿지 못한다. 국내 검증에 3년을 쓰는 동안 시장 자체가 늙는다.

그래서 순서가 뒤집힌다. 국내와 해외를 시간 순서로 나누지 않고, 처음부터 도달 비용이 낮은 시장을 1차로 잡는다. 부산 팀에게 그 시장은 일본이다. 물류로 보면 부산항에서 하카타항까지 페리로 갈 수 있는 거리다. 시차도 없다. 비즈니스 문화의 결도 미국보다 한국에 가깝다. 의사결정이 느린 건 단점이지만, 한 번 들어가면 잘 바꾸지 않는 록인이 거꾸로 장점이 된다.

동남아도 같은 논리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은 모바일 인구가 폭발하는데 현지 SaaS 공급은 비어 있다. 한국이 먼저 겪은 모바일 전환의 노하우가 그대로 시간차 무기가 된다. 미국에서 한국 팀은 후발 주자지만, 동남아에서는 앞선 주자다.

반론도 있을 것이다. 일본과 동남아는 미국보다 객단가가 낮고 자본 회수 규모도 작은데, 결국 작은 시장에 안주하는 다운그레이드 아니냐는 것이다. 절반은 맞다. 단일 시장만 보면 미국이 크다. 하지만 진출 순서를 묻는 질문에 단일 시장 크기로 답하면 틀린다. 근접 시장에서 먼저 매출과 레퍼런스를 만든 팀이 그 체력으로 미국에 들어가는 것과, 검증 없이 미국부터 들이받는 것은 생존 확률이 다르다. 근접 시장은 종착지가 아니라 활주로다.

생태계가 들고 있는 옛 지도

문제는 창업자는 이미 순서를 바꿨는데 생태계는 아직 옛 지도를 들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부터 보자. 한국 VC의 글로벌 트랙은 대부분 미국향이다. 일본 시장에 같이 들어가 줄 현지 네트워크, 동남아 유통 채널을 연결해 줄 파트너십, 이런 자산을 가진 펀드가 드물다. 창업자가 후쿠오카에서 영업하는 동안 투자자는 여전히 실리콘밸리 데모데이 사진을 원한다. 자본의 지도와 창업자의 지도가 어긋나 있는 셈이다.

인재도 마찬가지다. 한국 스타트업이 가장 구하기 어려운 사람이 일본어 비즈니스 인력, 동남아 현지 운영 인력이다. 영어 가능한 인재 풀은 두꺼운데, 정작 1차 시장이 된 곳의 언어와 상거래 관습을 아는 사람은 시장에 거의 없다. 생태계가 글로벌을 영어로만 정의해 온 부작용이다.

규제와 고객 접근은 더 구조적이다. 일본의 폐쇄적인 기업 구매 관행, 동남아 각국의 파편화된 결제 인프라. 창업자 한 명이 뚫을 수 있는 벽이 아니다. KOTRA나 중소벤처기업부의 해외 지원 프로그램은 여전히 미국과 유럽 박람회 중심으로 짜여 있는 경우가 많다. 가장 가까운 1차 시장을 위한 공공 인프라가 가장 비어 있는 역설이다.

생태계가 따라가야 할 속도

세계의 다른 생태계는 근접 시장 우선을 이미 제도로 만들어 뒀다. 이스라엘은 작은 내수를 건너뛰고 처음부터 미국과 유럽을 동시에 보는 본 글로벌 모델을 국가 차원에서 설계했다. 싱가포르는 동남아 전체를 자기 마당으로 삼는 허브 전략을 정부 자본과 규제 완화로 받쳐 줬다. 핵심은 창업자에게 글로벌 마인드를 가지라고 훈계한 게 아니라, 특정 진출 경로를 생태계가 통째로 깔아 줬다는 데 있다.

한국에 필요한 것도 다르지 않다. 일본과 동남아를 1차 시장으로 잡는 팀에게 자본은 그 시장의 현지 파트너를 연결하는 펀드여야 하고, 인재 정책은 영어 일변도에서 벗어나야 하고, 공공 지원은 박람회 부스가 아니라 현지 결제와 규제를 뚫는 실무 통로여야 한다. 부산은 이 변화의 자연스러운 거점이다. 일본과의 지리적 근접, 항만 물류, 이미 형성된 한일 상거래의 결까지. 서울이 미국 디폴트를 복제하는 동안, 부산은 다른 진출 순서를 실험하는 무대가 될 수 있다.

창업자들은 이미 세계를 보고 있다. 다만 그들이 보는 세계 지도는 미국을 중심에 둔 낡은 지도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시장부터 점령해 나가는 새 지도다. 이제 자본과 인재와 규제가 그 지도를 같이 들어야 한다. 생태계가 창업자의 속도를 따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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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싯요정

엑싯요정

스타트업 생태계 전략가

국내 1등엔 강한데 세계로 가는 다리 앞에서 멈추는 한국 팀들. 그 병목을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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