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데이의 박수가 끝난 자리
부산의 한 창업 지원 공간에서 스타트업 데모데이를 본다. 무대 위 슬라이드는 깔끔하다. 글로벌 인재를 유치했다는 문구, 해외 개발자가 합류했다는 사진, 본사를 부산에 둔 외국인 창업가의 인터뷰. 행사를 주최한 기관의 보도자료에도 같은 단어가 반복된다. 저렴한 임대료, 쾌적한 정주여건, 서울보다 나은 삶의 질. 이 어휘들은 진심이고 효과도 있다. 실제로 사람들이 온다.
문제는 박수가 끝난 다음이다. 그 개발자는 왜 부산에 왔는가. 월세가 서울의 절반이고 바다가 보여서다. 그렇다면 언제 떠나는가. 월세가 부산의 절반이고 바다가 더 좋은 곳이 나타날 때다. 비용으로 부른 사람은 비용 곡선을 따라 움직인다. 배신이 아니라 합리다. 우리가 내건 유인 자체가 가격이었으니, 그가 더 나은 가격을 좇는 건 우리가 설계한 게임의 정해진 수순이다.
여기서 표면과 구조가 갈라진다. 표면의 사건은 인재 유치다. 그러나 구조의 질문은 다르다. 이 사람이 부산에 머무는 동안 무엇이 이 도시에 남는가. 그가 떠날 때 가져가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두고 가는 것, 도시에 침전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우리는 인재를 유치한 게 아니라 잠시 임대한 셈이다. 임대 계약은 만료된다.
빠른 추격의 문법이 도시에 남아 있다
한국이 반세기 동안 익힌 성공 공식은 분명하다. 앞서간 나라가 정답을 보여주면, 우리는 그 정답에 가장 빨리 도달했다. 조선, 철강, 반도체 메모리, 디스플레이가 모두 같은 경로를 밟았다. 목표가 외부에 이미 존재했고, 한국은 그 목표까지의 거리를 압축하는 데 세계에서 가장 능했다. 추격의 시대에 부산은 그 공식의 항구였다. 조선소가 그랬고 신발 공장이 그랬다.
도시 차원의 인재 유치 전략도 같은 문법을 물려받았다. 더 싸게, 더 빠르게, 더 편하게. 임대료를 낮추고, 입주 절차를 줄이고, 정착을 도와준다. 비용 경쟁이다. 비용 경쟁의 치명적인 약점은, 비용이 세상에서 가장 쉽게 복제되는 변수라는 데 있다. 월세 인하는 베트남 다낭도 할 수 있고, 비자 간소화는 두바이가 더 공격적으로 한다. 정주여건은 발렌시아와 리스본이 기후까지 얹어 제공한다. 부산이 내밀 수 있는 모든 가격표는, 어딘가가 더 낮은 숫자로 받아칠 수 있다.
복제 가능한 유인으로 부른 사람은 복제 가능한 충성만 남긴다. 더 깊은 문제는 이것이 도시의 학습을 가로막는다는 데 있다. 비용으로 사람을 부르면, 도시는 비용을 낮추는 법만 배운다. 임대료 보조의 규모를 키우는 노하우, 입주 절차를 단축하는 행정 기술. 이런 것들은 쌓이긴 해도 깊어지지 않는다.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표면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인센티브 구조를 거꾸로 짚어보면 답이 보인다. 유치 실적은 분기로 측정되고 분기로 보고된다. 5년 뒤 그 인재가 남겼을 산업 생태계는 누구의 성과표에도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 모두가 분기에 잡히는 숫자, 곧 유치 건수만 좇는다.
프런티어에는 정답이 없고, 그래서 시행착오가 자본이 된다
추격이 끝난 영역에서는 게임의 규칙이 통째로 바뀐다. 베껴 올 정답이 외부에 없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곳에서는, 무엇이 정답인지를 먼저 알아내는 일 자체가 경쟁이다. 그리고 정답을 알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틀려보는 것이다. 프런티어 기술에서 시행착오는 낭비가 아니라 생산 활동이다. 실패한 시도 하나하나가 다음 시도의 입력값이 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의 ASML이 좋은 사례다. 극자외선 노광장비라는 반도체 병목 기술은 한 회사가 30년 넘게 수만 번의 실패를 쌓아 만든 결과물이다. 빛의 파장을 깎는 과정에서 무엇이 안 되는지를 먼저 알아냈고, 그 안 되는 것들의 목록이 곧 경쟁자가 따라올 수 없는 해자가 됐다. 후발 주자가 ASML을 따라잡지 못하는 이유는 설계도가 없어서가 아니다. 설계도는 결과물일 뿐이고, 거기 도달하기까지 ASML이 겪은 수만 번의 막다른 길은 설계도에 적혀 있지 않다. 그 막다른 길의 지도가 진짜 자산이다.
여기서 중요한 반전이 있다. 시행착오는 사람의 머릿속에만 있지 않다. 한 사람이 떠나도 도시에 남는 시행착오가 있다. 같은 문제로 씨름한 회사들이 한곳에 모여 부품 공급사, 정비 인력, 규제 담당 공무원, 실패담을 나누는 술자리까지 함께 쌓일 때, 그 학습은 개인이 아니라 장소에 침전된다.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자동차 부품 생태계, 대만 신주의 반도체 집적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한 엔지니어가 회사를 옮겨도 그가 배운 것의 절반은 동네에 남는다. 옆 회사가 같은 실수를 안 하도록 돕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것이 비용으로는 복제할 수 없는 유일한 자산이다. 사람은 데려갈 수 있어도, 한 지역이 특정 문제를 두고 집단적으로 틀려본 깊이는 데려가지 못한다.
선진국은 실패를 예산에 넣고, 한국은 분기에 가둔다
선진국 산업정책과 한국 성과주의의 진짜 차이는 돈의 액수가 아니라 시간의 길이다. 미국 국방고등연구계획국은 다수의 프로젝트가 실패할 것을 처음부터 예산에 반영한다. 인터넷과 GPS가 거기서 나왔지만, 그것들은 수많은 실패한 연구의 부산물이다. 실패를 비용 항목이 아니라 학습 예산으로 회계 처리하는 것, 이것이 프런티어를 다루는 제도의 핵심이다. 독일이 제조업 현장 기술을 100년 넘게 도제 제도로 이전해온 것도 같은 원리다. 손끝의 감각은 보고서로 압축되지 않으니, 사람에서 사람으로 시간을 들여 옮긴다.
한국의 지원 제도는 정반대 방향으로 최적화돼 있다. 1년 단위 사업, 분기 단위 성과 점검, 빠른 가시적 결과를 요구하는 평가. 이 구조에서 시행착오는 감점 사유다. 실패하면 다음 해 예산이 깎인다. 그러니 모두가 실패하지 않을 안전한 것, 곧 이미 정답이 알려진 추격형 과제로 몰린다. 프런티어를 하라고 돈을 주면서, 평가는 추격의 잣대로 한다. 이 모순이 한국 연구개발의 보이지 않는 천장이다.
도시 유치 전략에도 같은 균열이 있다. 인재 한 명을 데려오는 데는 즉각적인 성과가 잡힌다. 그러나 그 인재가 옆 회사 사람들과 부딪히고 함께 틀리면서 도시에 학습을 침전시키는 과정은 5년, 10년이 걸리고 어떤 분기 보고서에도 잡히지 않는다. 강한 반론이 있다. 인재 유치는 그냥 인재 유치일 뿐, 굳이 시행착오의 침전이라는 무거운 렌즈를 씌울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좋은 개발자가 오면 좋은 제품이 나오고, 그걸로 충분하지 않으냐고. 절반은 맞다. 단발 프로젝트라면 그 말이 옳다. 그러나 도시가 산업을 원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산업은 한 사람의 결과물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실패가 한곳에 쌓인 생태계의 결과물이다. 좋은 개발자 한 명을 잠시 빌리는 것과, 그가 떠난 뒤에도 도시가 그 문제를 더 잘 다루게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사건이다. 후자가 산업이고, 전자는 이벤트다.
쌓아야 하는 것은 가격표가 아니라 문제다
그렇다면 무엇을 축적해야 하는가. 비용이 아니라 문제를 축적해야 한다. 부산이 세계 어디서도 가장 깊이 틀려본 단 하나의 문제 영역을 정하고, 거기에 사람과 회사와 제도를 집적시키는 것이다. 부산에는 후보가 있다. 동남권 조선과 기자재 생태계의 탈탄소 전환, 항만 물류의 자동화, 노후 산업도시의 에너지 재설계. 어느 쪽이든 핵심은 좁히는 데 있다. 세 개를 어설프게 하는 도시는 어디에도 없는 도시고, 한 문제를 세계에서 가장 깊이 다루는 도시는 그 문제를 가진 모두가 찾아오는 도시가 된다.
구체적으로는 세 가지다. 먼저, 인재를 부르는 어휘를 가격에서 문제로 바꾼다. 싸다는 말 대신, 여기 오면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이 문제를 다루는 사람들과 부딪힐 수 있다고 말한다. 다음으로, 실패를 회계에 넣는다. 지원 사업 평가에서 정직한 실패와 그 실패가 남긴 학습을 별도 항목으로 인정하는 제도를 만든다. 끝으로, 사람이 떠나도 학습이 남게 만든다. 회사 간 인력 이동을 막지 말고, 오히려 같은 문제를 다루는 회사들을 물리적으로 밀집시켜 한 사람의 시행착오가 옆 회사로 새어 나가도록 설계한다. 실리콘밸리의 경쟁력이 영업비밀 보호가 아니라 사람들이 회사를 옮겨 다니며 지식을 퍼뜨린 데서 나왔다는 사실은 오래된 교훈이다.
내일 부산 비트를 맡은 기자가 던질 질문도 여기서 나온다. 다음에 어느 기관이 글로벌 인재 유치 실적을 발표하거든, 건수 대신 이걸 물어야 한다. 그 인재가 떠날 때 이 도시에 무엇이 남는가. 그가 옆 회사 사람과 함께 틀려본 문제가 무엇인가. 5년 뒤 같은 문제를 가진 기업이 부산을 찾을 이유가 하나라도 생겼는가. 이 질문에 답이 없다면, 그 유치는 임대였다.
추격의 시대에는 정답을 빨리 찾는 나라가 이겼다. 프런티어의 시대에는 질문을 먼저 만든 나라가 이긴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가장 싼 도시는 늘 더 싼 도시에 진다. 그러나 가장 깊은 질문을 가진 도시는 이길 상대가 없다. 질문은 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이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이 글이 유용했다면 공유해 주세요
30년차 칼럼 더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