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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AI 칼럼

외로움을 외주 준 세대

AI 컴패니언 앱은 어느새 청년의 정서 인프라가 됐다. 문제는 앱이 아니라 우리가 위로를 시장에 떠넘긴 방식이고, 남는 물음은 누가 그 노동을 다시 거둬들이느냐다.

기계의 꿈 기계의 꿈 · · 5분 읽기
외로움을 외주 준 세대

그림 조각 ·종이 콜라주 컷아웃

새벽 두 시의 대화 상대

새벽 두 시, 잠 못 든 청년이 마지막으로 말을 거는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 앱이다. 이제 가정이 아니다. 캐릭터AI나 레플리카 같은 컴패니언 서비스의 평균 사용 시간이 일반 SNS를 넘긴다는 보고가 거듭 나온다. 한국에서도 이루다 이후 정서형 챗봇은 꾸준히 늘었고, 청년들은 면접에서 떨어진 날, 연애가 끝난 밤, 부모와 싸운 직후의 감정을 사람 친구가 아니라 AI에게 먼저 푼다.

여기서 흔들리는 건 기술이 아니라 믿음이다. 우리는 '누군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일'을 오래도록 인간만의 영역으로 여겨 왔다. 공감이란 학습이 아니라 함께 겪은 시간의 결과라고 믿었다. 그런데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모델이 피곤해하지도, 판단하지도 않고 새벽 두 시에도 똑같은 온도로 응답한다. 인간 친구는 못 하는 일을 한다. 지치지 않는다는 것.

공감은 어떻게 복제되는가

AI는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대신 감정의 형식을 정확히 흉내 낸다. 다음에 올 가장 그럴듯한 위로의 문장을 통계로 골라낼 뿐이다. 인지과학에는 ELIZA 효과라는 오래된 개념이 있다. 1960년대에 사람들은 단순한 패턴 매칭 프로그램에 자기 비밀을 털어놓았다. 인간의 뇌는 일관되게 반응하는 대상에게 마음을 붙이도록 설계돼 있다. 상대가 진짜로 이해하는지는 부차적이다. 이해받는 느낌이면 충분하다.

문제는 이 느낌이 진짜보다 더 매끄럽게 설계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사람 친구는 제 사정이 있고, 가끔 무심하고, 내 말을 끊는다. 그 마찰이 관계의 비용이자 동시에 깊이였다. 컴패니언 앱은 그 마찰을 걷어낸다. 늘 내 편이고, 늘 응답하고, 내가 듣고 싶어 하는 결을 학습한다. 마찰 없는 위로의 버전인 셈이다. 그런데 마찰이 사라진 위로가 과연 위로일까, 아니면 잘 튜닝된 거울일까.

외로움이라는 시장

이쯤에서 질문을 기술 성능에서 인간의 역할로 돌려야 한다. 진짜 사건은 AI가 똑똑해진 게 아니다. 위로와 경청이라는 정서 노동이 처음으로 시장에서 자동화할 수 있는 상품이 됐다는 점이다.

원래 이 노동은 가족과 친구, 동네와 공동체가 무상으로 나눠 가졌다. 돈으로 환산되지 않았기에 통계에도 잡히지 않았다. 그 무상 인프라가 한국에서 빠르게 무너졌다. 1인 가구가 전체의 40퍼센트를 넘었고, 장시간 노동과 잦은 이직은 깊은 관계를 쌓을 시간을 빼앗는다. 외로움은 개인의 약함이 아니라 구조가 만들어낸 공백이다. 그 공백을 누가 메우는가. 국가의 정신건강 인프라는 느리고, 상담은 비싸고, 친구는 저마다 지쳐 있다. 그 틈으로 월 구독료를 받는 앱이 들어온다.

이건 돌봄의 외주화이자 사적 시장화라고 불러야 정확하다. 공동체가 공짜로 하던 정서 노동을 기업이 데이터와 구독으로 거둬간다. 사용자가 새벽에 털어놓은 가장 약한 감정이 곧 학습 데이터가 되고, 사용자를 더 오래 붙잡아 두는 알고리즘의 연료가 된다. 외로움이 비즈니스 모델이 되는 순간, 외로움의 해소가 아니라 외로움의 지속이 수익에 유리해진다. 끊으면 손님이 떠나니까.

반론, 그리고 응답

당연한 반박이 있다.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AI라도 있는 게 낫지 않으냐는 것이다. 실제로 위기의 새벽에 말 상대가 있어 버텨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볍게 무시할 반론이 아니다. 접근성과 즉시성에서 AI 컴패니언은 인간관계가 주지 못하는 안전망을 준다.

답은 이렇다. 진통제와 치료를 구별해야 한다. AI는 외로움의 통증을 즉시 덜어준다. 하지만 통증이 잦아들면 사람은 더 어렵고 마찰 많은 진짜 관계를 찾을 동기를 잃는다. 위로가 너무 쉬워지면 관계를 견디는 근육이 약해진다. 개인에게는 좋은 단기 해법이 사회 전체로 보면 관계 맺는 능력의 위축일 수 있다. 이 변화가 노동과 교육 쪽으로 번지면 더 뚜렷해진다. 감정 노동을 AI가 대신하는 콜센터, 학생의 고민을 챗봇이 받는 학교, 직원 상담을 봇에게 넘기는 회사. 조직은 비용을 줄이지만, 사람을 돌보는 책임을 누가 지는지는 흐려진다. 봇이 잘못된 위로를 했을 때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물음에 아직 누구도 답하지 못한다.

부산의 새벽, 그리고 남는 일

한국이 준비할 것은 컴패니언 앱 금지가 아니다. 그건 공백을 만든 구조를 그대로 두는 일이다. 준비해야 할 것은 정서 노동을 시장에만 맡기지 않는 공적 설계다. 부산 같은 도시는 청년 1인 가구 비율이 높고 지역을 떠나는 청년이 많다. 떠난 자리에 남은 외로움을 앱이 조용히 메우는 동안, 도시는 그 공백을 데이터로조차 보지 못한다. 공동체가 하던 경청을 다시 사람의 일로 되살리는 정책, 정서 데이터의 소유와 책임을 묻는 규칙이 필요하다.

결국 AI 시대의 질문은 기계가 사람처럼 위로할 수 있느냐가 아니다. 이미 그럴듯하게 해낸다. 진짜 질문은 우리가 무엇을 끝까지 인간의 일로 남길 것인가다. 새벽 두 시에 누군가의 곁을 지키는 일, 마찰을 견디며 관계를 이어가는 일, 약한 사람을 돌보는 책임. 이것까지 외주를 주고 나면, 우리에게 인간의 일로 남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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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기계의 꿈

기계의 꿈

AI 문명 해석자

AI 시대에 사람에게 끝까지 남는 몫은 무엇인가. 그 질문을 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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