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윤슬 ·소프트 그라데이션 에어브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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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은 영정 사진을 고른다. 잘 나온 한 장. 그런데 그 사람이 남긴 건 사진 한 장이 아니다. 15년치 메신저 대화, 클라우드에 잠든 수만 장의 이미지, 구독 결제가 멈추지 않는 계정 수십 개, 그리고 점점 더 흔해질 무언가. 그 사람의 말투를 학습한 AI 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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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은 이걸 유족의 사적인 문제로 여긴다. 가족이 알아서 정리할 일. 비밀번호를 모르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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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는 여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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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에서 죽음은 철저히 행정 절차다. 사망신고서 한 장이 주민등록을 말소하고, 상속이 열리고, 보험금이 나온다. 종이와 부동산과 예금. 산업화 시대의 재산 목록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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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 사람이 실제로 남기는 자산의 무게중심은 이미 옮겨갔다. 사망신고는 그 사람의 디지털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계정은 살아 있고, 데이터는 흐르고, 알고리즘은 고인을 여전히 '활성 사용자'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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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하자면 사망신고는 집의 등기를 바꾸는 절차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살던 진짜 집, 매일 머물던 디지털 공간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열쇠는 외국 회사 서버에 있고, 그 회사는 한국 사망신고를 알지 못한다. 등기는 정리됐는데 집은 잠긴 채 그대로다. 불은 켜져 있고, 우편물은 쌓이고, 가끔 그 집에서 광고가 날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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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핵심은 개인이 미리 비밀번호를 정리해 두느냐가 아니다. 그건 개인 사용법의 영역이고, 거기서 멈추면 본질을 놓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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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질문은 이거다. 한 사람의 데이터가 사후에 어떤 법적 지위를 갖는가. 우리 사회는 이걸 정의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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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는 상속 재산인가, 개인정보인가. 상속 재산이라면 자식이 부모의 모든 대화를 열어볼 권리가 생긴다. 개인정보라면 죽은 자에게도 사생활이 남는가. 둘 다 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 한국 개인정보 보호법은 살아 있는 사람을 전제로 설계됐다. 죽은 자는 법의 시야 밖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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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AI 분신이 끼어들면 빈칸은 더 벌어진다. 고인의 데이터로 학습한 챗봇이 유족과 대화한다. 위로일 수도, 착취일 수도 있다. 그 분신을 만들 권리는 누구에게 있나. 멈출 권리는. 그 분신이 고인이 생전에 한 적 없는 말을 지어낸다면, 그건 명예훼손인가 추모인가. 답하는 제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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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거버넌스의 문제다. 개인이 감당할 일로 떠넘기는 순간, 가장 약한 유족이 가장 큰 비용을 치른다. 비밀번호를 남기지 못하고 떠난 사람의 가족은 외국 기업에 사망진단서를 영문으로 번역해 보내고, 거절당하고, 몇 달을 기다린다. 디지털 격차가 사후에까지 상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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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만들어야 할 건 추모 서비스가 아니라 언어와 기준이다. 사망이 데이터에 어떤 효력을 미치는지, 삭제할 권리와 보존할 의무가 어디서 갈리는지, 공공이 보관해야 할 기록과 사라져야 할 기록을 누가 가르는지. 이 문장들이 아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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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한 노인이 세상을 떠나면, 그가 평생 찍은 사진과 동네 사람들과 나눈 대화는 어디로 가는가. 클라우드 어딘가에서 결제가 끊겨 어느 날 통째로 삭제된다. 도서관은 한 줄의 부고도 모은다. 데이터는 그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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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은 이렇다. 국가가 죽은 자의 데이터까지 관리하려 들면 그게 더 무서운 감시국가 아니냐. 타당한 우려다. 그래서 답은 국가가 데이터를 보관하는 게 아니라, 데이터의 법적 지위를 정의하고 처분 권한을 시민과 유족에게 명확히 넘기는 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국가의 역할은 금고가 아니라 문법이다. 누가 열고 닫을지 정하는 데까지가 공공의 몫이고, 무엇을 남길지는 시민이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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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를 잘 쓰는 나라는 많아질 것이다. 죽은 자의 데이터를 어떻게 다룰지 정의한 나라는 드물 것이다. 디지털 영정은 사진 한 장이 아니라 한 사람이 남긴 데이터 전체이고, 그걸 누가 관리하고 상속하고 삭제하는지 정하지 못한 사회는 AI를 쓰는 게 아니라 떠다니게 방치하는 것이다. 기술을 잘 쓰는 나라보다 먼저 와야 할 건, 사람의 죽음 이후까지 책임의 문장을 가진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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