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조각 ·종이 콜라주 컷아웃
영정 사진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장례식장 한쪽, 검은 리본을 두른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은 오랫동안 한 가지 약속을 지켰다. 더는 변하지 않는다는 약속. 고인은 거기서 멈췄고, 산 사람은 그 멈춤을 바라보며 천천히 보내는 법을 배웠다. 애도란 본래 그 정지된 얼굴과 나누는 일방향의 대화였다.
이제 그 사진이 대답한다. 생전의 목소리와 말투, 자주 쓰던 표현을 학습한 모델이 고인의 음성으로 손주의 안부에 응한다. 한국에서도 추모 분야 스타트업과 일부 상조 사업자가 메모리얼 아바타, 고인 음성 복원을 상품으로 내놓기 시작했다. 중국의 한 업체는 죽은 가족을 디지털로 되살리는 서비스로 수천 건을 처리했다고 알려졌고, 미국에서는 StoryFile이 생전 인터뷰 영상으로 사후 질의응답을 만든다. 기술은 이미 충분히 그럴듯하다. 문제는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모방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그리움이다
이 서비스가 정말 복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봐야 한다. 모델은 고인의 의식을 되살리지 않는다. 고인이 남긴 텍스트와 음성, 영상이라는 데이터의 통계적 그림자를 재생할 뿐이다. 인지과학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마음 이론, 상대에게 내면이 있다고 가정하는 인간의 본능이 여기서 거꾸로 작동한다. 우리는 패턴에 불과한 출력에 자동으로 마음을 부여한다.
그러니까 아바타가 모방하는 진짜 대상은 죽은 사람이 아니다. 살아남은 사람의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끝이 없으니, 그것을 채워주는 상품도 끝이 없다. 여기서 이 산업의 영리한 구조가 드러난다. 일회성 장례는 종결을 판다. 구독형 추모는 종결되지 않음을 판다. 매달 결제가 이어지는 한 고인은 서버에서 살아 있고, 결제가 끊기면 두 번째 죽음이 온다. 죽음이 사건에서 상태로, 끝에서 구독 가능한 지속으로 바뀐 것이다.
진짜 청구서는 슬픔의 소유권에 적힌다
요금제는 표면이다. 구조를 들여다보면 청구서에는 세 가지가 더 적혀 있다.
하나는 애도의 종결권이다. 정신의학에서 애도는 떠난 이를 내면에 다시 자리 잡게 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으로 본다. 그런데 매일 대답하는 아바타는 이 재배치를 멈춰 세운다. 보내야 할 대상이 계속 말을 걸어올 때, 유족은 슬픔을 끝낼 권리를 서비스에 넘긴 셈이 된다. 끊으면 죄책감, 유지하면 정지. 어느 쪽도 자유롭지 않다.
다음은 고인의 동의 없는 인격이다. 죽은 사람은 자신이 어떤 말투로 부활할지 협상할 수 없다. 아바타가 생전엔 하지 않았을 말을 한다면, 그것은 기억의 왜곡이자 인격에 대한 사후 편집이다. 누가 고인을 대신해 그 출력을 검수하는가. 한국은 개인정보보호법이 살아 있는 개인에 초점을 두고 있어, 사망자의 데이터 인격을 다룰 규범이 사실상 비어 있다.
마지막은 데이터의 인질화다. 고인의 목소리 모델은 업체 서버에 있다. 유족은 그것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접근권을 빌린다. 회사가 폐업하거나 약관을 바꾸거나 가격을 올리면, 두 번째 죽음의 스위치는 유족이 아니라 사업자가 쥔다. 가장 사적이어야 할 슬픔이 가장 외부에 종속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먼저 정해야 할 것
부산의 한 상조 행사장에서 디지털 추모를 봤다는 이야기가 업계에 돈다. 이 기술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위안이 진짜이기 때문이다. 떠난 부모의 목소리를 한 번 더 듣고 싶은 마음을 누가 비난하겠는가.
반론은 분명하다. 사진도 편지도 유품도 결국 고인을 붙잡으려는 도구였다. 아바타는 그 연장선일 뿐 새로운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다만 결정적 차이가 하나 있다. 사진은 응답하지 않는다. 응답하지 않기에 유족은 빈자리를 스스로 메우며 애도를 완성한다. 양방향성은 그 빈자리를 외주로 돌린다. 빈자리를 느끼는 일, 그것이 바로 보내는 일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사회가 정할 것은 기술의 허용 여부가 아니라 경계다. 사망자 데이터에 대한 권리는 누가 가지는가. 생전 동의를 의무화할 것인가. 종료권, 곧 유족이 언제든 아바타를 안식시킬 권리를 약관이 아니라 법으로 보장할 것인가. 구독을 멈추면 모델 원본을 유족에게 넘기도록 강제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으면, 가장 깊은 슬픔이 가장 약한 계약의 손에 맡겨진다.
무엇을 인간의 일로 남길 것인가
AI가 죽은 이의 목소리까지 합성하는 시대에 진짜 물음은 기계가 사람처럼 슬퍼할 수 있느냐가 아니다. 슬픔을 끝까지 겪어내는 일, 빈자리를 빈자리로 견디는 일, 보낼 때를 스스로 정하는 일. 이것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일로 남길 것인가, 아니면 그것마저 매달 갱신되는 서비스에 넘길 것인가. 애도는 효율화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끝내 직접 통과해야 하는 통로였다. 그 통로를 외주 주는 순간 우리가 잃는 것은 고인이 두 번째로 죽는 일이 아니라, 산 사람이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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