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각잡이 ·기하학 플랫 벡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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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의 어느 데모데이 무대. 창업가가 슬라이드에 이렇게 적는다. "우리는 적자를 키운다." 객석은 박수친다. 적자 곡선이 가파를수록 환호도 커진다. 이 장면을 처음 본 한국 사람이라면 미친 짓이라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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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자리의 투자자들은 미치지 않았다. 그들은 한 가지를 알고 있다. 미국 시장은 한 제품이 5천만 명에게 동시에 팔릴 수 있는 단일 언어, 단일 결제, 단일 법률의 평원이라는 것. 적자를 태워 점유율을 사면, 그 점유율이 나중에 독점 가격을 정당화한다. 적자는 비용이 아니라 베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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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창업가가 이 장면을 수입할 때는 대개 슬라이드만 가져온다. "성장 우선, 수익은 나중에." 문장은 같은데 발 딛은 땅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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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첫 오해가 생긴다. 우리는 이걸 '담대함'의 문제로 읽는다. 미국 창업가는 과감하고 한국 창업가는 소심하다는 식이다. 용기만 더 내면 따라잡을 수 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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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이건 용기가 아니라 산수의 문제다. 5천만 명 시장에서 적자로 점유율을 사면 언젠가 회수 구간이 온다. 같은 5천만이라도 언어와 소득, 플랫폼으로 잘게 쪼개진 시장에서 똑같이 하면, 점유율을 다 사들여도 회수할 만한 독점 가격이 안 나온다. 같은 전략에 다른 결말. 전략이 틀린 게 아니라, 그 전략이 가정한 세계가 한국에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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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구조는 이렇다. 실리콘밸리 플레이북은 중립적인 경영 지식이 아니라, 특정한 시장 크기와 자본 깊이와 규제 공백을 전제로 압축된 로컬 지식이다. Y Combinator의 "Do things that don't scale", "Default alive", 폴 그레이엄의 에세이들, 이 모두가 보편 진리처럼 유통되지만 실은 미국이라는 좌표 위에서만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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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이 점을 이미 논쟁으로 다룬다. 벤처 자본이 한 종류의 회사, 즉 초고속 확장과 승자독식만 길러내면서 다른 유형의 건강한 사업을 고사시킨다는 비판이 있다. 티엘 류의 독점 예찬에 대한 반론도, 이른바 '좀비 유니콘'들이 적자 베팅을 회수하지 못한 채 valuation만 부풀었다는 회고도 나온다. 그쪽에서 플레이북은 그 자체로 정치적, 경제적 논쟁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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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이 논쟁을 건너뛰고 결과물만 받는다. 우리는 "린 스타트업", "PMF", "그로스 해킹"을 용어로 수입하면서, 정작 그 용어가 어떤 싸움 끝에 나온 임시 합의였는지는 수입하지 않는다. 답안지는 베끼면서 시험 문제는 안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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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반론도 가능하다. 자본도 인재도 결국 글로벌 표준으로 수렴하는데, 미국이 가장 앞섰으니 그걸 따르는 게 합리적이지 않냐는 것이다. 늦은 추격자는 원본을 카피하는 게 정석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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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말이지만 절반만 맞다. 수렴하는 건 도구이고, 수렴하지 않는 건 조건이다. 결제망, 규제 속도, 내수 천장, 노동법, LP의 인내심. 도구는 베껴도 되지만 도구가 작동할 조건까지 베껴지지는 않는다. 카피해야 할 것은 답이 아니라 그들이 그 답에 도달한 사고의 경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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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는 이 구조가 더 또렷하다. 서울조차 미국 플레이북의 번역본인데, 지역 창업 생태계는 그 번역본을 다시 번역한다. 원본에서 두 단계 떨어진 사본을 쥐고 "왜 우리는 실리콘밸리처럼 안 되나"를 묻는다. 안 되는 게 당연하다. 질문 자체가 우리 땅의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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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위험은 실패 자체가 아니다. 잘못된 전략으로 실패하면 전략을 의심하지만, 베낀 전략으로 실패하면 우리 자신을 의심하게 된다는 점이다. "역시 한국은 안 돼", "인재가 부족해", "자본이 작아." 구조가 다른 것을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오독하면, 진단도 처방도 영원히 빗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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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베끼지 말라는 말은 문을 닫고 폐쇄적으로 굴라는 뜻이 아니다. 정반대다. 더 깊이 읽으라는 뜻이다. 그레이엄의 결론이 아니라 그가 반박하려던 통념을, YC 슬로건이 아니라 그 슬로건이 끝낸 논쟁을 읽어야 한국 조건으로 다시 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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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늦게 수입하는 것은 기술만이 아니다. 때로는 질문 자체를 늦게 수입한다. 실리콘밸리에서 가져와야 할 가장 비싼 수입품은 그들의 정답이 아니라, 그들이 아직도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는 그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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