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갱지 ·리소그래프 2도 인쇄
시리즈 B를 앞둔 한 부산 핀테크 창업자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기술을 가장 잘 쓸 곳은 사실 대형 금융지주인데, 그쪽은 살 생각이 없어요. 만들어서 따라 하면 되니까." 그가 걱정하는 건 인수가 아니라 복제였다. 좋은 회사를 만들수록 베껴질 위험이 커지는 시장. 한국 스타트업이 매일 마주하는 출구의 풍경이 이렇다.
한국 스타트업의 한계는 흔히 창업가의 야망 부족이나 글로벌 감각 결여로 설명된다. 나는 그 진단이 게으르다고 본다. 창업가는 이미 처음부터 세계를 보고 시작한다. 진짜 문제는 그들이 회사를 넘길 곳, 즉 출구가 거의 막혀 있다는 데 있다. 출구가 좁으면 그 압력은 거꾸로 창업 첫날의 의사결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출구가 하나뿐인 시장
스타트업 생태계는 들어가는 입구만큼이나 나가는 출구로 작동한다. 미국에서 스타트업 엑시트의 압도적 다수는 M&A다. 상장은 예외적인 사건이고, 대부분의 창업가와 초기 투자자는 더 큰 회사에 회사를 팔며 자본과 인재를 회수한다. 그렇게 회수된 돈과 사람이 다음 창업으로 순환한다. 엑시트는 끝이 아니라 생태계의 혈류다.
한국은 이 혈류의 한쪽이 거의 막혀 있다. 대기업이 스타트업을 사는 일이 드물다. 인수 대신 내재화를 택한다. 좋은 아이디어가 보이면 사들이기보다 자체 조직을 꾸려 비슷한 걸 만든다. 카카오나 네이버 같은 플랫폼이 일부 인수에 나서긴 하지만, 제조와 금융과 유통을 쥔 전통 대기업 진영에서 스타트업 인수는 여전히 낯선 선택지다. 그래서 한국 창업가에게 남은 출구는 사실상 IPO 하나다.
인수가 작동하지 않는 구조
대기업이 인색해서가 아니다. 구조가 인수를 억제한다. 한국 대기업의 의사결정은 오너와 핵심 계열사를 중심으로 묶여 있어, 외부 회사를 사들여 통합하는 일이 내부 정치적으로 비싸다. 사는 순간 책임이 생기고, 실패하면 누군가 그 책임을 진다. 공정거래 규제와 대기업집단 지정 제도도 계열사 편입에 신고와 감시 부담을 얹어, 인수가 곧 규제 표면적의 확대로 읽힌다. 노동 경직성도 무겁다. 인수한 회사의 인력을 유연하게 재배치하기 어려우니, 차라리 기술만 보고 자체 개발하는 편이 안전하다고 판단한다.
여기에 결정적인 한 가지가 더 있다. 베끼는 비용이 사는 비용보다 싸다는 것이다. 특허와 영업비밀 보호가 약하고 소송으로 회복할 실익이 작은 시장에서, 대기업으로선 인수보다 모방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러니 창업가가 출구로 기대하던 바로 그 대기업이 가장 무서운 경쟁자로 돌아선다.
출구의 압력이 위험 감수를 보수화한다
핵심은 여기에 있다. 출구가 IPO 하나로 좁혀지면, 그 좁은 문은 창업의 모든 단계를 거꾸로 물들인다.
IPO는 기준이 까다롭다. 일정 규모의 매출, 흑자 트랙 레코드, 안정적 지표를 요구한다. 그래서 출구가 상장뿐인 창업가는 처음부터 상장 가능한 회사를 설계하게 된다. 5년 안에 흑자가 나는 모델, 국내에서 검증 가능한 매출, 심사를 통과할 깔끔한 숫자. 역설적이게도 가장 야심 찬 베팅, 그러니까 오래 적자를 감수하며 세계 시장을 먼저 깔아두는 전략이 가장 위험해진다. M&A 출구가 살아 있는 시장이라면 흑자가 안 나도 기술과 팀과 시장 지위만으로 회사를 비싸게 넘길 수 있다. 그 가능성이 창업가에게 더 크고 더 느린 베팅을 허락한다.
한국엔 그 안전망이 없다. 그래서 창업가는 빨라야 할 곳에서 빨라지지 못하고, 느려도 될 곳에서 조급해진다. 위험을 회피해서가 아니라 생태계가 보수적 설계를 강제하기 때문이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출구 지형의 문제다.
물론 반론도 있다. M&A 활성화가 만능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기업이 헐값에 잠재 경쟁자를 사들여 시장을 닫는 약탈적 인수, 이른바 킬러 인수의 위험이다. 맞는 지적이다. 그러나 한국의 문제는 인수가 과해서가 아니라 거의 없어서 생긴다. 약탈적 인수를 걱정하기 전에, 정상적인 인수가 일어나는 빈도부터 끌어올려야 하는 단계다. 둘은 순서가 다른 과제다.
생태계가 따라가야 할 조건
그러면 무엇을 바꿔야 하나. 세 가지다.
우선 인수의 비용을 낮춰야 한다. 기술 탈취와 모방에 실질적 대가가 따르도록 영업비밀과 특허 보호를 강화하면, 대기업의 계산식에서도 베끼기보다 사기가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인수를 막는 규제가 아니라 베끼기를 비싸게 만드는 규제가 필요하다.
중간 출구도 만들어야 한다. IPO와 폐업 사이가 너무 비어 있다. 스타트업 간 인수, 사모펀드의 성장형 인수, 세컨더리 거래로 초기 투자자와 창업 멤버가 일부라도 회수하는 통로가 두꺼워져야 한다. 출구가 여러 개면 창업가도 더 다양한 위험을 감수한다.
끝으로 출구의 좌표를 해외로 넓혀야 한다. 한국 시장 안에서만 출구를 찾으면 회사의 천장도 한국 크기에 맞춰진다. 처음부터 미국, 일본, 동남아의 전략적 인수자를 잠재 출구로 상정하고 회사를 설계할 수 있도록, 크로스보더 M&A 자문과 네트워크가 생태계의 기본 인프라로 깔려야 한다.
창업가는 이미 세계를 보고 있다. 부산의 그 핀테크 창업자도 처음부터 글로벌 금융 인프라를 겨냥했다. 그를 작게 만든 건 야망이 아니라, 회사를 넘길 곳이 상장 하나뿐인 출구 지형이었다. 출구가 하나면 베팅도 하나가 된다. 이제는 생태계가 창업가의 속도를 따라가야 한다. 출구를 여러 개 열어주는 일, 그게 다음 10년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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