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갱지 ·리소그래프 2도 인쇄
폭락한 것은 게임이 아니라 부채였다
2021년 액시 인피니티의 SLP 토큰이 무너졌을 때, 사람들은 게임이 재미없어졌다고 말했다. 틀린 진단이다. 무너진 건 게임플레이가 아니라 회계 구조였다. SLP는 무제한으로 발행됐고, 신규 유입이 멈추면 가치가 사라지도록 설계돼 있었다. 회계의 언어로 옮기면, 들어오는 자본을 기존 보유자에게 배당으로 돌려주는 구조다. 신규 입금이 멈추는 순간 장부가 비는, 폰지의 표준 형태다.
가격 차트만 보면 이 사건은 그저 한 토큰의 99퍼센트 하락으로 기록된다. 차트는 결과를 보여주되 원인은 숨긴다. 진짜 원인은 게임 자산이 부채인지 자본인지 구분하지 못한 데 있었다. 플레이어에게 약속한 미래 수익은 회계상 부채다. 그 부채를 갚을 현금흐름이 신규 유입뿐이라면, 그건 자산이 아니라 폭탄의 타이머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게임 속 노동이 진짜 일이 되려면, 그 노동의 산출물은 어떤 장부에 어떻게 기록되는가. 여기에 답하지 못하는 온체인 게임 자산은 전부 같은 길을 간다.
살아남은 모델은 현금흐름을 가진 모델이다
P2E 붕괴 이후에도 조용히 작동을 이어간 구조가 있다. 길드 모델, 정확히는 토큰화된 자산 풀과 거기 연결된 현금흐름이다. 한때 화려했던 Yield Guild Games는 NFT 자산을 빌려주고 플레이어 수익의 일부를 받는 구조였다. 표면적으로는 P2E와 같아 보여도 회계적으로는 다르다. 길드 토큰은 발행량 무제한의 보상 토큰이 아니라, 실제 자산(게임 내 캐릭터, 토지, 인게임 생산 수단)과 그 자산이 만드는 임대 수익에 대한 청구권에 가깝다.
이 차이가 생존을 갈랐다. 보상 토큰은 가치의 원천이 다음 입금자였다. 자산 토큰은 가치의 원천이 자산의 생산성이었다. 전자는 유입이 멈추면 0으로 수렴하고, 후자는 자산이 수익을 못 내면 가격이 빠지긴 해도 0이 되진 않는다. 부동산 임대 펀드가 공실률이 올라도 건물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제도권 자본이 디지털 자산에 들어오는 조건은 단순하다. 자산이 무엇을 담보하는지 식별 가능할 것, 현금흐름이 추적 가능할 것, 청구권의 우선순위가 명확할 것. P2E 보상 토큰은 이 셋 중 어느 하나도 만족하지 못했다. 반면 길드 자산 토큰 일부는 적어도 첫 번째와 두 번째 문턱은 넘었다. 그래서 가격이 90퍼센트 빠진 뒤에도 시장이 남았다.
여기서 반론이 하나 가능하다. 길드 모델도 결국 게임 인기에 의존하니 본질은 투기 아니냐는 것이다. 절반은 맞다. 다만 회계적으로 보면 투기와 사업의 경계는 현금흐름의 출처에 있다. 신규 토큰 구매자에게서 나오면 투기, 자산 사용료에서 나오면 사업이다. 게임 인기가 떨어지면 사업의 매출이 줄지만, 그건 모든 콘텐츠 사업이 공통으로 지는 위험이지 폰지의 표식은 아니다.
커스터디와 공시가 재미를 자산으로 바꾼다
온체인 게임 자산이 진짜 금융 자산이 되려면 인프라 세 가지가 필요하다. 보관, 공시, 유동성이다.
보관부터 보자. 게임 아이템이 NFT라는 사실은 소유권 증명의 절반일 뿐이다. 나머지 절반은 그 NFT를 안전하게 보관하고, 분실이나 도난 시 책임 소재가 분명한 커스터디 구조다. 코인베이스 커스터디나 BitGo 같은 기관 수탁사가 NFT를 다루기 시작한 것은, 게임 자산이 개인 지갑의 장난감에서 기관 대차대조표의 항목으로 넘어가는 신호다. 자산은 보관 가능할 때 비로소 담보가 되고, 담보가 될 때 비로소 자본을 끌어온다.
공시가 두 번째다. 길드 토큰이 신뢰를 얻으려면 보유 자산의 목록과 각 자산의 수익률, 토큰 발행량과 소각량이 정기적으로 공개돼야 한다.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준비금 공시(attestation)를 둘러싸고 벌인 전쟁을 떠올리면 된다. 테더가 오랫동안 의심받은 이유, USDC가 상대적 신뢰를 얻은 이유는 결국 준비금을 누가 어떻게 증명하느냐에 있었다. 게임 자산 토큰도 같은 길을 간다. 온체인이라 모든 거래가 투명하다는 말은 절반만 진실이다. 데이터가 공개돼 있어도 그것을 회계 기준으로 정리해 공시하지 않으면 기관은 읽어내지 못한다. 원장은 투명한데 해석은 불투명한 상태, 그게 지금 대부분의 온체인 게임 경제다.
유동성이 세 번째다. 자산에 가격이 있어도 팔 수 없으면 자산이 아니다. P2E 토큰 다수가 무너진 마지막 단계는 유동성 증발이었다. 출구가 막힌 자산은 장부상 평가액이 얼마든 실현할 수 없다. 전통 금융이 시장 조성자와 거래소 상장 기준으로 유동성을 제도화한 이유가 여기 있다.
한국은 게임 강국이라는 자산을 회계로 옮겨야 한다
한국은 비대칭적인 두 위치에 동시에 서 있다. 세계적인 게임 개발력을 가졌으면서, 게임 내 자산의 현금화는 강하게 규제해왔다. 게임산업법이 환전 가능한 게임머니를 금지한 것은 사행성 방지라는 합리적 목적에서 출발했다. 문제는 이 규제가 P2E를 통째로 막으면서, 합법적 자산 토큰과 폰지형 보상 토큰을 구분할 회계 인프라를 키울 기회까지 함께 닫아버렸다는 점이다.
설계의 방향은 금지가 아니라 분류여야 한다. 우선 게임 자산 토큰을 그 현금흐름의 출처로 분류하는 회계 기준이 필요하다. 신규 발행 의존형에는 증권에 준하는 공시 의무를, 자산 사용료형에는 별도 범주를 적용하는 식이다. 다음으로 게임 자산 커스터디를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 체계 안으로 끌어와 수탁 책임을 명문화해야 한다. 끝으로 발행량과 소각량, 보유 자산 내역의 정기 공시 표준을 만들어야 한다. 부산이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됐던 경험은, 격리된 환경에서 이런 분류 실험을 먼저 돌려볼 토대가 된다.
이건 게임 회사를 위한 특혜가 아니다. 디지털 자산 전체의 회계 인프라를 미리 까는 일이다. 게임 자산은 디지털 자산 가운데 가장 복잡한 형태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생산수단과 소비재의 성격을 한 토큰이 동시에 가진다. 이걸 회계로 분리해내는 능력을 키우면, 그보다 단순한 다른 디지털 자산은 자연히 다룰 수 있게 된다.
다음 승부처는 차트가 아니라 장부다
P2E의 교훈은 블록체인이 게임에 안 맞는다는 게 아니다. 재미를 토큰으로 바꾸는 순간, 그 토큰이 부채인지 자본인지를 회계가 판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판별을 시장 구조가 대신 해주지 않으면 모든 게임 경제는 같은 폭락을 반복한다.
살아남은 모델과 죽은 모델의 차이는 게임의 재미가 아니라 장부의 정직함이었다. 가격 차트는 이 차이를 끝까지 숨긴다. 두 토큰이 같은 속도로 오를 때, 차트만 보면 둘 다 좋은 자산처럼 보인다. 하나는 자산 위에 서 있고 다른 하나는 다음 입금자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은 회계로만 보인다. 가상자산의 다음 승부처는 어느 토큰이 더 오르느냐가 아니다. 어느 시장이 자산과 부채를 정직하게 구분하는 구조를 먼저 갖추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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