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숯 ·목탄·연필 스케치 + 워시
스테이블코인 뉴스를 가격으로 읽는 습관이 있다. 디페그가 났다, 시총이 얼마다, USDT가 어디까지 갔다. 그런데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지금의 국내 논쟁은 차트에 찍히는 게 하나도 없다. 아직 발행된 코인이 없으니까. 그런데도 시장 구조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이게 최근 몇 년 디지털 자산 영역에서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라는 걸 안다. 가격이 아니라 발행권이 걸려 있어서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누가 이 코인을 사느냐가 아니다. 누가 이 코인을 찍을 권리를 갖느냐다.
권능의 위탁이라는 본질
법정통화에 1대1로 연동되고, 준비금으로 가치를 보증하고, 결제와 송금에 쓰이는 토큰. 기능만 떼어 보면 이건 예금도 아니고 전자화폐도 아닌, 화폐에 매우 가까운 무언가다. 한국은행이 원화 스테이블코인에 날을 세우는 이유가 여기 있다. 발행 주체가 누구든, 원화에 고정된 지급 수단을 민간이 찍어내는 순간 통화 공급과 신용 창출의 경로에 새 행위자가 끼어든다.
은행 컨소시엄 8개사 모델이 거론된다는 사실 자체가 협상의 성격을 드러낸다. 표면적으로는 안정성을 위한 설계다. 자본력 있고 감독받는 은행들이 공동으로 발행하면 런(run) 위험이 낮다는 논리.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한 겹 벗기면 이건 국가가 독점해온 발행 기능의 일부를 누구에게, 어떤 지분으로 떼어주느냐의 문제다. 컨소시엄에 들어간 8개사와 못 들어간 나머지의 차이는 단순한 사업 기회 차이가 아니다. 앞으로 디지털 원화 결제망에서 누가 통행료를 걷느냐가 갈린다.
전통 금융의 언어로 옮기면 명확해진다. 중앙은행이 본원통화를 찍고, 은행이 신용을 통해 통화를 증식하는 게 현행 구조다. 스테이블코인 발행권은 이 두 번째 층, 곧 민간 통화 창출의 디지털 판본을 새로 여는 일이다. 그래서 한은과 금융위의 대립은 부처 간 영역 다툼이 아니라 화폐 권력의 재분배 협상이다.
자본은 가격이 아니라 구조를 보고 들어온다
기관 자금이 어떤 조건에서 움직이는지 보면 이 논쟁의 무게가 다르게 잡힌다. 제도권 자본은 수익률 차트를 보고 들어오지 않는다. 청산 구조, 보관 책임, 회계 처리 가능성, 파산 시 우선순위를 본다. 미국에서 비트코인 현물 ETF가 풀린 뒤 자금이 들어온 건 가격이 매력적이어서가 아니라 적격 커스터디언이 자산을 보관하고, 운용사가 공시 의무를 지고, 기존 증권 계좌로 편입할 통로가 생겨서다. 인프라가 자본의 입장 조건을 만든다.
원화 스테이블코인도 똑같은 잣대를 통과해야 한다. 준비금이 어디에 어떤 형태로 예치되는가. 국채인가 단기 예금인가, 그 구성을 누가 실시간으로 검증하는가. 발행사가 무너지면 토큰 보유자는 일반 채권자인가 우선 변제 대상인가. 이 질문에 답이 없으면 기업 재무팀도, 자산운용사도 결제 수단으로든 보유 자산으로든 손을 대지 않는다. 발행권 경쟁이 화려하게 진행되는 동안 정작 시장을 만드는 건 이 지루한 항목들이다.
여기서 강한 반론이 가능하다. 은행 컨소시엄이라면 이미 감독받는 주체이니 준비금과 건전성은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 아니냐. 절반만 맞다. 은행은 예금자 보호와 자기자본 규제 안에 있지만, 스테이블코인은 예금이 아니다. 토큰 보유자가 예금자 보호 대상인지, 준비금이 은행의 대차대조표 안인지 밖인지, 발행이 은행 고유 업무인지 자회사 업무인지에 따라 보호 수준이 완전히 달라진다. 감독받는 주체가 찍는다는 사실만으로 안전이 보증되지 않는다. 설계가 보증한다.
한국이 설계해야 할 것
그래서 한국이 지금 정해야 하는 건 누가 발행하느냐의 명단이 아니라 발행을 둘러싼 규칙의 골격이다.
준비금 분리 보관과 실시간 검증을 법으로 못박아야 한다. 발행사 자산과 준비금 자산이 섞이면 그 코인은 디페그 한 번에 무너진다. 다음은 커스터디 면허 체계다. 토큰의 기초 자산과 토큰 자체를 누가 어떤 자격으로 보관하는지가 없으면 기관은 못 들어온다. 공시 주기와 감사 의무도 마찬가지다. 월 1회 준비금 attestation 정도로는 부족하고, 구성과 만기까지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민감한 부분. 발행권을 8개사 컨소시엄으로 닫을지, 면허제로 열어 경쟁시킬지다. 닫으면 안정적이되 과점이 고착되고, 열면 혁신적이되 부실 발행사 리스크가 커진다. 한은이 발행 단계 감독에 관여하고 금융위가 사업 인가를 맡는 식의 권한 분리가 현실적 절충이겠지만, 그 경계선이 곧 화폐 권력의 분점선이 된다.
부산은 이 설계에서 실증 좌표가 될 수 있다.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돼 디지털 자산 실험의 제도적 공간을 이미 갖췄다. 발행권 본게임은 중앙에서 정해지겠지만, 준비금 검증과 결제 정산의 인프라 실증은 지방 특구에서 먼저 돌려볼 수 있는 영역이다.
다음 승부처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승부는 어느 코인이 시총 1위를 먹느냐로 결정되지 않는다. 누가 발행권을 쥐느냐의 협상이 끝나고 나면, 그다음은 그 권한을 떠받칠 준비금과 커스터디와 공시가 신뢰할 만한 구조를 이루느냐로 넘어간다. 한은과 금융위가 지금 다투는 건 차트가 아니라 그 구조의 설계도다.
가상자산의 다음 승부처는 가격이 아니다. 신뢰할 만한 시장 구조다. 발행권을 누가 쥐느냐는 질문도 결국 같은 곳으로 수렴한다. 권력을 나눠 갖는 방식이 곧 그 화폐를 믿을 수 있게 만드는 구조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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