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조각 ·종이 콜라주 컷아웃
사람들은 Web3를 가격으로 읽지만, 진짜 변수는 담보의 재사용이다
리스테이킹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 수익률부터 떠올린다. 이더리움을 맡겨 한 번 이자를 받고, 그 맡긴 증서를 다시 맡겨 또 이자를 받는 구조다. EigenLayer가 연 그 문은 디파이 역사상 가장 빠르게 수십억 달러를 끌어모았다. 시장은 이걸 새로운 수익 상품으로 본다.
그건 표면이다. 리스테이킹의 본질은 수익이 아니라 담보의 재사용이다. 자산 하나가 여러 약속을 동시에 떠받치게 만드는 기술. 이더리움 검증자가 맡긴 ETH는 원래 메인넷 합의를 보증하는 담보였다. 리스테이킹은 같은 ETH에 두 번째, 세 번째 임무를 떠안긴다. 어떤 오라클의 정직성, 어떤 브리지의 안전, 어떤 데이터 가용성 레이어의 약속까지 함께 보증하라고.
여기서 익숙한 그림자가 진다. 자산 하나가 여러 채무를 동시에 떠받치는 구조. 2008년에 우리가 봤던 바로 그 형태다.
신뢰는 자동화될 수 있지만, 재사용되면 농축된다
Web3를 코인으로만 보면 이 위험이 보이지 않는다. 프로토콜의 눈으로 봐야 한다. 이더리움의 스테이킹은 신뢰를 자동화하는 장치다. 사람이 은행을 믿는 대신, 자산을 묶어두고 거짓말하면 그 자산을 잃게 하는 슬래싱 규칙으로 정직을 강제한다. 신뢰가 코드와 담보로 환원되는 것이다. 이건 정산 프로토콜의 핵심 발명이고, 나는 이 발명을 지지한다.
문제는 같은 담보를 몇 번이나 빌려 쓰느냐다. 리스테이킹은 ETH 한 단위의 신뢰를 여러 서비스에 나눠 준다. 각 서비스로선 든든한 담보를 빌린 셈이다. 그러나 시스템 전체로 보면, 실제 담보는 한 겹인데 그 위에 약속만 여러 겹 쌓인다. 신뢰가 복제된 게 아니라 농축된 것이다.
2008년 구조화 금융이 여기 그대로 겹친다. 주택담보대출 하나가 MBS로 묶이고, 그 MBS가 CDO로 다시 묶이고, CDO가 CDO 제곱으로 또 묶였다. 단계마다 같은 현금흐름이 새 증권의 담보가 됐다. 평소엔 각 층이 따로 노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초 자산이 흔들리는 순간, 모든 층이 같은 방향으로 한꺼번에 무너졌다. 위험이 분산된 게 아니라 한 점에 응축돼 있었던 탓이다.
리스테이킹의 슬래싱은 이 응축의 온체인 버전이다. 한 검증자가 여러 서비스를 동시에 보증하다 한 곳에서 잘못하면, 그의 담보가 깎인다. 그러면 그가 보증하던 다른 서비스들의 안전 마진도 덩달아 줄어든다. L2 확산은 이 연결을 더 촘촘하게 짠다. 수십 개의 롤업이 같은 이더리움 보안에 정산을 기대고, 그 사이를 잇는 브리지와 오라클이 다시 리스테이킹 담보에 기댄다. 노드 하나의 사고가 옆 노드로 번질 경로가 늘어나는 것이다.
AI 에이전트가 들어오면 이 탑은 더 빨리 높아진다
머지않아 이 시스템의 주된 사용자는 사람이 아니라 AI 에이전트가 된다. 에이전트가 경제 주체가 되려면 네 가지가 있어야 한다. 자기가 누구인지 증명하는 신원, 과거 행동이 쌓이는 평판, 즉시 값을 치르는 결제, 약속을 강제하는 정산. x402 같은 결제 규약이 에이전트의 머신 결제를 열고, ERC-8004 같은 표준이 에이전트의 신원과 평판을 온체인에 새기려 한다. 그렇다면 이 신원과 평판은 무엇을 담보로 보증되는가. 결국 같은 스테이킹 풀, 같은 리스테이킹 담보로 수렴한다.
위험한 건 속도다. 사람은 패닉에 빠지는 데 몇 시간이 걸린다. 에이전트는 밀리초 단위로 같은 신호에 반응한다. 한 담보 풀에서 슬래싱 위험이 감지되면, 수천 개의 에이전트가 동시에 포지션을 청산하고 같은 출구로 몰린다. 2008년의 뱅크런을 기계 속도로 돌린 셈이다. 신뢰의 표준을 먼저 설계하지 않으면, 우리는 더 똑똑한 행위자들에게 더 취약한 구조를 넘겨주게 된다.
한 가지 반론, 그리고 응답
물론 반론이 있다. 리스테이킹은 옵트인이고, 슬래싱 조건은 서비스마다 따로 정하며, EigenLayer는 위험 격리 장치를 설계하고 있다는 것. 2008년의 불투명한 장외 증권과 달리 모든 담보와 의존 관계가 온체인에 투명하게 공개된다는 것. 맞는 말이다. 투명성은 진짜 차이다.
그러나 2008년의 진짜 실패는 불투명함만이 아니었다. 위험이 어디 있는지 다 보여도, 모두가 같은 자산에 같은 방향으로 노출돼 있으면 분산은 환상이 된다. 온체인 투명성은 응축을 보게 해줄 뿐, 응축을 없애지는 못한다. 본다고 안 무너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같은 위험을 동시에 보기 때문에 출구로 더 빨리 몰릴 수도 있다.
한국은 사용자가 아니라 표준의 설계자여야 한다
여기서 한국의 자리가 보인다. 부산 금융중심지가 디지털 자산 거래소 유치를 말할 때, 대부분은 코인을 사고파는 장터를 떠올린다. 그건 사용자의 자리다. 설계자의 자리는 다른 데 있다.
한국은 콘텐츠와 게임에서 평판 시스템을 오래 운영해온 나라다. 게임 아이템의 소유권 증명, 창작물의 출처 추적, 사용자 행동의 신뢰 점수. 이건 그대로 에이전트 경제의 평판 인프라 문제다. 한국이 선점해야 할 표준은 코인 상장이 아니라 담보 재사용의 안전 한도를 재는 척도다. 담보 하나가 몇 겹의 약속을 떠받치는지 그 깊이를 정량화하고 한도를 거는 규약. 구조화 금융이 끝내 갖지 못한 레버리지 상한선의 온체인 버전이다.
AI 에이전트의 성능을 높이는 경쟁은 미국 빅테크가 이미 저만치 앞서 있다. 그러나 그 에이전트들이 거래할 때 무엇을 신뢰할지, 그 신뢰가 몇 번 재사용돼도 안전한지를 정하는 표준은 아직 비어 있다. 성능보다 먼저 설계해야 할 것은 신뢰의 표준이다. 담보 위에 담보를 쌓는 일을 멈추라는 게 아니다. 몇 겹까지 쌓아도 무너지지 않는지, 그 한도를 누가 먼저 코드에 박아넣느냐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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