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각잡이 ·기하학 플랫 벡터
27조 달러라는 숫자의 함정
RWA, 그러니까 실물자산 토큰화 시장이 빠르게 부풀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뺀 온체인 토큰화 자산은 2025년 초 60억 달러에서 2026년 5월 310억 달러를 넘겼다(RWA.xyz).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미국 국채와 정부보증 상품이고, 토큰화된 미 국채만 4월 기준 약 128억 달러다. 사람들은 이 숫자를 보고 "실물이 체인 위로 올라왔다"고 말한다.
틀렸다. 체인 위로 올라온 것은 자산이 아니라 자산을 가리키는 포인터다.
토큰화된 국채 한 개는 국채 그 자체가 아니다. 어떤 특수목적법인(SPV)이나 수탁기관이 진짜 국채를 들고 있고, 토큰은 그 보유분에 대한 청구권을 표시할 뿐이다. 체인은 이 포인터를 완벽하게 추적한다. 누가 언제 얼마를 가졌는지 1초도 틀리지 않는다. 문제는 포인터가 가리키는 끝, 오프체인의 법적 권리가 체인만큼 단단하게 보증되느냐다. 다리는 여기서 끊긴다.
신뢰의 다리가 끊기는 지점
구조로 보면 RWA 스택은 두 세계를 잇는 다리다. 한쪽은 코드가 진실인 세계, 다른 쪽은 계약서와 관할권과 파산법이 진실인 세계. 토큰 이전(transfer)은 코드 세계에서 끝나지만, 소유권 이전은 반드시 반대편 세계의 승인을 받아야 효력이 생긴다. 토큰을 넘겼다고 법적 권리가 저절로 따라 넘어가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가장 약한 지점은 SPV의 파산격리(bankruptcy remoteness) 구조다. 발행사가 무너졌을 때 토큰 보유자가 기초자산에 우선권을 갖느냐, 아니면 줄 선 무담보 채권자 중 하나로 전락하느냐. 이 차이는 스마트컨트랙트 코드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신탁 약정서, 관할 법원, 그리고 수탁사가 실제로 자산을 분리 보관했는지에 달려 있다. 미국에서 신탁회사들이 RWA의 백본으로 떠오른 이유가 이것이다. 신탁이 수탁자 자격으로만 보유한 재산은 채무자의 파산재단에서 빠지니, 코드가 아니라 법이 격리를 보증하는 셈이다.
상환도 마찬가지다. 어떤 토큰은 일일 환매를 주고, 어떤 토큰은 통지 기간과 최소 금액을 건다. 화면에 찍힌 잔고는 즉시지만, 실제 현금화는 오프체인 절차의 속도로만 움직인다. 2026년 5월 Ondo의 창업자 리스크가 시장을 흔든 사건이 보여준 것은, 토큰의 안전이 결국 사람과 법인의 신뢰도에 묶여 있다는 오래된 진실이었다.
AI 에이전트가 거래 주체가 되면, 이 균열이 폭발한다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Web3를 코인과 거래소로만 보는 시각은 이 다음 장면을 놓친다. 머지않아 토큰화 자산을 사고파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AI 에이전트가 된다.
이미 신호가 있다. Coinbase가 만든 x402 결제 프로토콜은 휴면 상태였던 HTTP 402 코드를 되살려, 에이전트가 API 응답을 받기 전 스테이블코인으로 즉시 결제하게 한다. 4월 말 기준 누적 거래 1억6500만 건, 활성 에이전트 6만9000개를 기록했고, 이 표준은 Google과 Stripe, Visa가 참여한 채로 리눅스재단으로 넘어갔다. 결제는 풀렸다. 그런데 결제보다 먼저 풀려야 할 질문이 남는다. 이 에이전트는 누구인가, 믿을 만한가, 잘못하면 누가 책임지는가.
1월 29일 이더리움 메인넷에 올라온 ERC-8004 'Trustless Agents'가 바로 이 빈자리를 겨눈다. 신원, 평판, 검증 세 개의 온체인 레지스트리로, 에이전트마다 ERC-721 식별자를 부여하고 상호작용 이력을 평판으로 쌓는다. 첫 달에만 4만5000개 에이전트가 등록됐다. 신원(ERC-8004) + 결제(x402) + 정산(스테이블코인, 대부분 USDC) + 자산(RWA 토큰). 따로 떼어 보면 유행어들이지만, 묶으면 하나의 스택이다. AI 에이전트가 경제 주체로 거래하기 위한 신뢰 인프라다.
그런데 이 스택의 맨 아래, 자산 레이어가 앞서 말한 법적 균열을 품고 있다. 사람은 약관을 의심하고 환매 조건을 따져 읽는다. 에이전트는 토큰 메타데이터에 적힌 청구권을 액면 그대로 믿고 초당 수백 건을 체결한다. 포인터와 실물 사이의 틈, 인간 속도에서는 사고였던 것이 에이전트 속도에서는 시스템 리스크로 증폭된다.
반론: 그건 법이 풀 문제 아닌가
당연히 나올 반박이다. 법적 권리는 법원과 규제가 보증하는 영역이고, 프로토콜 설계자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는 것. 절반만 맞다. 법은 분쟁이 터진 뒤에 사후적으로 판단할 뿐, 거래 직전 실시간으로 청구권의 강도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초당 수백 건을 체결하는 에이전트에게 필요한 건 판결문이 아니라, 거래 그 순간 기계가 읽을 수 있는 신뢰의 표준이다. 파산격리 여부, 수탁사 신원, 상환 조건, 감사 증명을 토큰 자체가 검증 가능한 형태로 들고 다녀야 한다. 법이 결과를 보증한다면, 프로토콜은 그 보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거래 시점에 증명해야 한다. 이건 법의 일이 아니라 설계의 일이다.
한국은 사용자인가 설계자인가
부산 블록체인 특구가 몇 해째 규제 샌드박스를 돌렸지만, 정작 표준은 늘 바깥에서 정해져 들어왔다. 이번엔 다를 수 있는 창이 좁게 열렸다. 한국은 2026년 1월 토큰증권(STO) 법을 통과시켰고, 2027년 1월 본격 시행을 앞두고 있다. 시행령을 쓰는 이 12개월이 분기점이다.
선택지는 두 갈래다. 미국이 만든 신원, 결제, 정산 표준을 그대로 수입해 토큰을 발행하는 사용자가 되거나, 한국이 강한 영역에서 신뢰 표준 한 조각을 직접 설계하는 쪽이 되거나. 콘텐츠 IP의 권리 토큰화, 게임 아이템의 진짜 소유권 증명, 부동산 PF의 청구권 구조화는 한국이 자산과 데이터를 모두 쥔 드문 분야다. 토큰에 파산격리 등급과 상환 조건을 기계가 읽을 표준 메타데이터로 새겨 넣는 일, 이걸 STO 시행령 단계에서 의무화하면 한국발 'RWA 신뢰 카드'가 표준이 될 여지가 생긴다. 표준을 먼저 쓰는 쪽이 다음 10년의 규칙을 쥔다.
결론
RWA의 진짜 담보는 토큰이 아니다. 토큰 뒤의 법적 권리, 그리고 그 권리가 거래 시점에 증명되는 구조다. AI 에이전트가 경제 주체로 들어서는 시대에 우리가 먼저 설계해야 할 것은 에이전트의 성능이 아니라, 에이전트가 믿어도 되는 신뢰의 표준이다. 더 똑똑한 에이전트보다, 무엇을 믿을지 기계가 검증할 수 있는 다리가 먼저다. 다리를 놓지 않은 채 더 빠른 자동차만 만들면, 끊긴 지점에서 더 크게 추락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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