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보도자료는 대개 비슷한 문장으로 끝난다. "코딩과 고객지원, 문서 업무에 AI 에이전트를 전면 도입한다." 코파일럿이 깔리고, 고객센터에 챗봇이 붙고, 사내 위키는 하이퍼클로바X로 검색된다. 그러고는 다들 묻는다. 도입했나, 안 했나.
그게 틀린 질문이다. 도구는 이미 다 있다. 막힌 건 기술이 아니다.
도입은 끝났다, 막힌 건 위임이다
채택곡선으로 보면 지금 한국 대기업은 'AI를 써봤다'와 'AI에게 맡긴다' 사이의 좁은 구간에 끼어 있다. 보조 도구 단계의 에이전트는 있어도 그만이다. 꺼버려도 회사는 똑같이 굴러간다. 변곡점은 거기가 아니다. 어떤 결정을 사람 승인 없이 에이전트가 그냥 실행하도록 허락하는 순간, 그제야 '있어도 그만'이 '없으면 못 도는 것'으로 바뀐다.
그 구간을 막는 건 모델 성능이 아니다. RPA가 십 년째 깔려 있어도 결재선이 안 바뀌면 사람이 똑같이 한 번 더 클릭한다. 코파일럿이 코드를 짜줘도 그 코드의 버그를 누가 책임지느냐가 안 정해지면 그냥 빠른 초안 생성기에 머문다. 발명은 끝났고, 막힌 건 배포다. 배포를 막는 진짜 자산은 권한과 책임, 거부권이다. 결재라인 위의 부장, 보안팀, 법무, 감사가 각자 거부권을 한 조각씩 쥐고 있다. 거부권이 많을수록 에이전트는 영영 도우미에 갇힌다.
누가 무엇으로 보상받아 권한을 넘기는가
여기서 질문을 뒤집어야 한다. 우리는 'AI가 일을 대신한다'를 능력 문제로 본다. 실은 인센티브 배선 문제다. 고객센터 팀장은 응대 건수가 아니라 '사고 안 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니 에이전트에 실권을 안 준다. 환불 승인은 끝까지 사람이 누른다. 반대로 임원은 'AI 전환율'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위에서는 전면 도입을 발표하고, 아래에서는 거부권을 손에서 안 놓는다. 발표와 실적의 갭은 여기서 벌어진다. 게으름이 아니다. 서로 다른 목적함수가 같은 조직 안에서 충돌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강한 반론을 정면으로 받자. 이건 그냥 평범한 생산성 도구 도입 아닌가. 절반은 맞다. 대다수 도입은 진짜로 있어도 그만인 단계에 머문다. 하지만 결재선이 짧다고 알려진 조직일수록 — 프로덕트팀 자율성이 큰 평면 구조의 테크 기업처럼 — 위임이 먼저 일어날 만하다. 거부권 보유자가 적으니까. 그리고 바로 그런 조직에서 숨은 취약성이 먼저 드러날 수 있다. 에이전트가 자동 승인한 결정의 책임이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를 때다. 사내 로그가 'AI가 했다'로 끝나는 순간, 사고의 귀책점이 증발한다.
부산과 한국의 좌표로 보면 우리는 미국·중국처럼 모델 자체를 파는 판이 아니다. 깔린 모델 위에서 누가 먼저 결정권을 넘겨 운영 우위를 가져가느냐의 판에 있다. 글로벌 채택곡선의 임계 직전, 병목은 거버넌스다.
내일 같은 비트에 던질 질문
다음 'AI 전면 도입' 발표를 받으면 기능 목록 말고 이것부터 따져라. 사람 승인 없이 에이전트가 끝낼 수 있는 결정이 하나라도 늘었나. 그게 틀렸을 때 책임이 누구 이름으로 적히는지도 확인하라. 그리고 거부권을 내려놓은 부서를 찾아라 — 없으면, 그건 도입이 아니라 시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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