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갱지 ·리소그래프 2도 인쇄
우리는 장애를 날씨처럼 읽는다
행정전산망이 멈추면 뉴스는 같은 문장을 반복한다. 원인 파악 중, 복구 작업 진행 중, 재발 방지 대책 마련. 2023년 11월 정부24와 새올행정시스템이 멈춰 전국 민원 창구가 종이로 돌아갔을 때도, 2025년 9월 국가정보자원관리원 대전 본원의 화재로 수백 개 정부 시스템이 한꺼번에 내려갔을 때도 문장은 비슷했다. 시민은 그것을 날씨처럼 받아들인다. 가끔 비가 오듯 가끔 전산이 죽는다고.
이 독법이 문제의 절반이다. 장애를 외부에서 날아온 사고로 보면 대책은 늘 사후적이다. 더 큰 서버, 더 많은 이중화, 더 두꺼운 매뉴얼. 그러나 되풀이되는 전산 장애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오래전에 내린 결정들이 한꺼번에 청구서를 들고 찾아오는 사건이다.
기술 부채라는 보이지 않는 빚
소프트웨어 업계에는 기술 부채(technical debt)라는 말이 있다. 당장 빨리 만들려고 대충 짠 코드, 문서로 남기지 않은 설계, 낡은 채 방치한 부품이 쌓이는 것을 빚에 비유한 말이다. 빚이 그렇듯 처음엔 편하다. 출시가 빨라지고 예산이 절약된다. 문제는 이자다. 손대지 않은 시스템일수록 고치는 비용이 복리로 불어난다.
집에 빗대면 단순하다. 20년 된 집의 배관을 한 번도 갈지 않으면, 어느 날 터지는 건 가장 약한 한 곳이다. 그런데 그 집 도면을 그린 사람은 퇴사했고 배관이 어디로 지나가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누수는 사고가 아니라 예정된 일이다. 한국 공공 시스템 상당수가 이 상태에 가깝다. 수십 년간 여러 사업자가 조각조각 얹어온 코드, 떠난 개발자, 사라진 설계 문서. 겉으로는 멀쩡히 돌아가지만 속의 빚은 해마다 불어난다.
여기서 핵심 전환이 필요하다. 이 빚은 개인의 문제도, 한 부처 전산실의 문제도 아니다. 국가 재무제표에 잡히지 않는 부채다. 국가채무비율은 매년 발표되지만, '우리 공공 시스템이 얼마나 낡았고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주는 숫자는 어디에도 없다. 보이지 않으니 갚을 계획도 없다. 이것이 디지털 국가전략의 가장 큰 빈칸이다.
거버넌스의 문제이지 기계의 문제가 아니다
장애가 터지면 책임은 보통 가장 끝단으로 향한다. 야간 작업자, 현장 엔지니어, 특정 업체. 그러나 구조를 들여다보면 다른 그림이 나온다. 한국 공공 정보화는 오랫동안 최저가 낙찰과 단년도 예산에 묶여 있었다. 가장 싸게 부르는 업체가 1년 단위로 사업을 따고, 다음 해엔 다른 업체가 들어온다. 시스템을 길게 책임지고 이해하는 주체가 구조적으로 없다.
차세대 사회보장정보시스템이 개통 직후 수개월간 급여 지급 오류를 일으킨 일, 차세대 지방세 시스템이 출범과 함께 먹통이 된 일은 기술력의 부재라기보다 책임의 분산이 만든 결과에 가깝다. 만드는 사람과 오래 쓰는 사람, 책임지는 사람이 다 다르면 빚을 누가 갚을지도 정해지지 않는다. 부산처럼 자체 행정 데이터와 시민 서비스를 늘려가는 지방정부일수록 이 구조의 무게는 더 직접 얹힌다. 중앙이 흔들리면 지역 창구가 먼저 멈춘다.
반론은 가능하다. 어떤 거대 시스템도 장애는 피할 수 없고, 한국 공공 디지털 서비스는 세계적으로 앞선 편 아니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다만 앞서 있다는 사실과 빚을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르다. 빠르게 잘 지은 건물일수록 유지보수 계획 없이 두면 더 크게 무너진다. 속도는 빚을 갚아주지 않는다.
잘 쓰는 나라보다 제대로 이해하는 나라
그래서 필요한 것은 더 비싼 서버가 아니라 새로운 언어와 기준이다. 공공 시스템의 노후도를 재는 지표, 설계 문서와 데이터 구조를 국가 자산으로 보존하는 규칙, 만든 사람이 떠나도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책임성의 제도. 한국은 아직 이 빈칸을 메우지 못했다. 우리는 '디지털 정부'를 자랑하면서도, 그 정부가 무엇으로 만들어졌고 어디가 약한지를 측정할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
시민의 문해력도 여기에 걸린다. AI를 개인 생산성 도구로만 보는 시선으로는 이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질문은 '나는 이 기술을 잘 쓰는가'가 아니라 '우리 사회는 이 시스템을 이해하고 있는가'다. 전산 장애를 사고가 아니라 미뤄둔 빚으로 읽을 줄 아는 것, 그것이 AI 시대 시민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문해력이다.
기술을 잘 쓰는 나라는 많다. 그러나 자기가 무엇 위에서 돌아가는지를 제대로 아는 나라는 드물다. 보이지 않는 부채를 장부에 올리고, 이자를 계산하고, 갚을 순서를 정하는 일. 그 작업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다음 장애는 날씨가 아니라 관리할 수 있는 빚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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